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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틸킴 Apr 12. 2019

함부로 부끄럽다

저마다의 스타팅 자세


1.

이따금 멈칫할 때.

막 신호가 바뀌려는 횡단보도를 뛰어갈 때. 내 뒤로 할머니 한 분이 부지런히 따라올 때. 이내 그녀가 포기하고 멈춰 설 때. 그녀가 그녀를 앞질러 탄력 있게 튀어나가는 형형색색의 젊은이들을 볼 때. 그것을 바라보는 그녀의 심정을 떠올릴 때. 나는 어느새 뛰지도 걷지도 못하게 되어 머뭇거린다. 그녀는 지금 덜덜거리는 지팡이와 그만큼 낡아버린 무릎을 탓할까. 보란 듯이 젊고 건강한 나를 떠올린다. 자주 부끄러워진다.


이런 감정을 기만이라고 나의 친구는 일러주었다. 도대체 건강한 두 다리가 부끄러울 일일까. 그것들을 부러뜨릴 게 아니라면, 주어진 것을 잘 쓰며 살아가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감수하지 않고 살아가는 게 가끔은 부끄럽다. 다들 무언가를 감당하며 살아가는 데, 나는 살기만 하는 것도 힘들다. 무엇을 담고 살기엔 그릇이 너무 작은 탓이다. 이 감정을 나는 작은 그릇 컴플렉스라고 부른다.


그 컴플렉스야말로 행운이라고 나의 친구는 또 일러주었다. 네 그릇이 작은 건 사실일지 몰라. 하지만 그릇이 작을 수 있다는 건 행운이야. 그런 일로 고민할 수 있는 것도 행운이고. 네 고통이 지금의 그릇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니까. 그러니 다른 사람보다 덜 고통스럽다고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이 작은 그릇을 낑낑 짊어지고, 나는 헤아릴 수 없이 큰 그릇의 사람들을 보며 여전히 함부로 부끄러워한다.



2.

지난주 수영 수업시간이었다. 모처럼 공기가 맑고 하늘이 높아서, 수영장에 사람이 없었다. 둘만 남은 선생과 나는 어느새 서로의 미주알 고주알들을 나눠가졌다. 그는 시각 장애 아동들에게 수영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그 수업의 첫날은 이렇다고 했다.


“첫날엔 수영장을 따라 그냥 걸어요. 벽면의 타일을 하나하나 만져보면서. 타일로 거리감을 익히는 거예요. 여기 볼록한 곳이 중간, 여기 삐뚤어진 데가 레인 끝, 이렇게.”


물과 벽을 더듬어 가는 아이들. 더듬듯 헤엄칠, 그 천천한 수영을 떠올리며 나는 눈을 깜박거렸다. 잘 알지도 못하는 일에 눈물부터 떨구는 것은 얼마나 더 큰 기만일까, 나는 문득 친구에게 묻고 싶었다.


“중도 장애인들은 수영장 적응이 빠른 편이에요. 이 공간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하니까. 하지만 선천맹인 아동들은 훨씬 두려움이 크죠. 수영장이 대체 어떻게 생긴 건지, 물이란 게 뭔지 본 적이 없잖아요. 그래서 많이들 울어요. 엄마랑 끝까지 하겠다고 약속을 하고 풀에 들어와도 마찬가지예요. 엄마가 안 보이면 바로 떼를 쓰기도 하고. 너무 무섭고 힘드니까, 그러면 그만두게 할 줄 알고. 아무튼 그렇게 해서 1년 정도 지나면 초급 자유형을 해요.”


시각 장애인은 초급 자유형을 배우는 데 1년이 걸린다.


수영 선생의 이 말은 내게 아주 많은 것을 의미했다. 나는 초급 자유형을 하는 데에 3개월이 걸렸다. 그 후로 4~5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속도가 잘 안 붙는다. 몹시 열 받는 일이다. 수영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채로 와서 일주일 만에 쭉쭉 진도 빼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럴 때면 내가 구제불능처럼 느껴져 화가 났다. 나는 내 기민치 못한 운동 신경과 덜 떨어지는 협응력, 턱없는 소심함만 보았다. 내게 어떤 신체적 혜택이 있다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무엇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세상 많은 것들을 매우 빠르게 해낼 수 있단 건 의식한 적도 없었다.


장애가 있다 해서 그저 무엇을 극복해냈다는 것에만 의의를 둘 리가 없다. 내가 그랬듯이. 물 공포증인 내가 드디어 25m 수영에 성공한 것으로 만족하지 않듯이. 이 분한 마음은 같을 것이다. 목표 지점에 어서 도달하고 싶은 마음도, 가능하다면 누구보다 잘하고 싶은 마음도. 하지만 그저 보이지 않아서, 그 이유 하나로 있는 운동 신경마저 발휘하기 쉽지 않다. ‘무엇을 극복해냈다’는 것으로 강제 만족해야 할지도 모른다. 1년 동안 매주 수영장에 나와서 더딘 진도를 견뎌냈다는 건 그 모든 번민과도 싸우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얼마나 지난했을까. 얼마나, 저주스러웠을까.


그날, 집에 돌아와서 패럴림픽 수영 경기들을 보았다. 패럴림픽의 선수들은 같은 경기를 해도 스타팅 자세가 모두 달랐다. 서로의 몸이 다르기 때문이다. 팔이 없는 사람은 입으로 끈을 물고, 다리가 없는 사람은 손으로 스타팅대를 꼭 붙들고, 이것도 저것도 여의치 않은 사람은 도우미의 힘을 빌린다. 같은 영법을 해도 레인마다 헤엄쳐나가는 방식은 모두 다르다. 자신의 몸에 꼭 맞게, 자신이 물을 이겨온 방식 대로.


그들의 경기를 보며 나는 ‘함부로’에 대해 배운다. 함부로의 영역은 대개 사실도 포함한다. '배영의 추진력은 80%가 팔젓기다.’ 이 정의는 대부분의 경우 사실이다. 하지만 2012년 런던 패럴림픽에선 두 팔이 없는 선수가 팔이 있는 선수들 사이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세계 신기록이었다. 배영의 추진력이 팔젓기에서 나온다는 말, 이것은 그에게 얼마나 함부로 말해진 단정일 뿐일까. 그의 세계는 배영의 추진력에 팔이 필요 없는 세계다. 추진력은 허리의 웨이브로 만든다. 저마다의 추진력은 모두 다를 수밖에 없는데, 수영 교과서는 당당하게 말한다. 배영의 추진력은 팔젓기라고. 하나의 정의는 모두가 똑같은 세계에 살고 있을 때만 유효하다. 그렇다면 인생은 아마 정의 바깥에 있을 것이다. 모두가 아주 조금씩은 다 다르고, 인생엔 하루도 같은 날이 없으니까. 그러나 나는 하루의 대부분을 ‘무엇을 무엇이라’ 믿으며, 그 속 편한 말을 따라가지 못해 조급해하는 데 쓴다.



3.

패럴림픽의 카메라들은 함부로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1등이 들어왔다고 쉽게 화면을 바꿔 리플레이하지 않는다. 마지막 선수가 들어올 때까지 끈질기게 지켜본다. 관중석의 박수 소리도 함께 커진다. 나는 기만자답게 또 잠깐의 불편함을 느낀다. 이 박수는 동정일까. 그런 박수를 듣는 것이 기꺼울까. 하지만 역시 박수를 치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혼자 남아 마지막 바퀴를 채우는 게 어떤 심정인지 아니까. 마지막 선수의 경쟁상대는 아마 무의미 그 자체일 것이다. 패럴림픽이라 해서, 자신과 싸워 이기는 것으로 만족할 리 없다. 1,2,3등 바깥의 무의미와 싸우며 묵묵히 한발 한발 나아가는 것. 그 묵묵히가 얼마나 큰 최선인지 알기에, 이 박수는 그 누구도 기만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마지막 선수가 결승점에 들어오는 걸 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나는 패럴림픽 선수들에겐 쉽게 박수 치지만, 꼴찌로 남은 나에게는 한 번도 박수 친 적이 없다.


아름다운 꼴찌라고 눈물 흘리면서, 내가 꼴찌일 때는 사무치도록 좌절하는 마음.


내가 패럴림픽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 인생을 대할 수 있다면. 내 더딘 성공에 함부로 고개 돌리지 않고, 성공이 아예 없다 해도 꾸준히 헤엄쳐갈 수 있다면. 나의 스타팅 자세는 누구와도 다를 수밖에 없고, 앞으로의 헤엄도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할 수 있다면, 내 그릇 작은 인생에도 그렇게 박수를 보낼 수 있을까.




4.

어쨌거나 인간은 악하다. 나에게 없는 불행을 보아야만 자신의 행운을 상기할 만큼.

그리고 또 약하다. 그 사실을 못내 부끄러워할 만큼은.


나는 잘 모르는 것에 대해 함부로 쓰며 나이를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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