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의 의미
회사 동료였던 친한 언니가 있었습니다.
그 언니는 주변 사람들에게 수더분한 성격으로 항상 사랑을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정말이지 '괜찮은 여자'의 범주에 들었던 그 언니는 '괜찮은 남자'와 연애를 했고, 수월하게 결실을 맺을 것이라고 예상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괜찮은 언니'는 연애가 길어질수록 "결혼"을 놓고 갈등하곤 했습니다.
부족함 없는 생활, 친구들과의 깊은 우정, 남자 친구의 든든함까지 갖춘 생활이 충분히 만족스러운데, 굳이 "결혼"을 해서 변화를 일으킬 필요가 있을까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막 신혼 생활을 시작했던 새내기 주부였고, 결혼하면 좋은 점에 대한 여러 가지 이유를 들며 설득하려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시간이 흘렀고 그 언니가 결혼을 했습니다.
삼십 대의 기혼 여성이 된 두 사람이 만나 수다를 떠들던 중, 언니의 말에 무릎을 탁 쳤던 기억이 납니다.
# "결혼하니깐 말이야. 정말이지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져서 참 좋은 것 같아."
# "그렇지? 편하지? 결혼하면 좋다니깐!ㅋ"
# "예전에는 주변의 친구들이나 지인들을 잘 챙기고, 잘 지내기 위해서 내가 먼저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거든. 생일도 먼저 챙겨줘야 하고, 연락도 먼저 하고, 상대방이 나의 마음을 오해하면 오해를 풀기 위해서 또 노력해야 하고.. 그런데 결혼하고 진짜 내 편이 생겼다는 생각이 드니까, 그런 것들에서 훨씬 자유로워진 것 같아."
나는 정말 좋은 사람이고 싶다.
저는 오랜 친구들과, 직장 동료와, 심지어 가족관계에서도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이런 마음은, 싱글라이프의 외로움을 견디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사람을 좋아하는 성향 탓에, 타인과의 좋은 관계에서 쉽게 행복을 발견해왔기 때문입니다.
서로 비슷한 환경을 공유하면서 "우리는 조금 닮았다."는 동질감을 토대로 이뤄진 공동체를 오랜 시간 유지하면서, 그 안에서 되도록 따뜻하고 인정받는 사람으로 남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대입, 취업, 결혼을 거치며 닮았던 우리의 환경은 조금씩 차이가 벌어지기 시작했고, 그 차이가 두려워 간극을 메우려 너무나 마음 쓰고 살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좋은 관계를 위한 최선이고, 배려라고 생각했습니다.
되도록 그들이 봤던 내 인생의 일부를 <나>라는 전체로 감싸고, 기대하는 대로 움직이려고 애썼습니다.
사실은 애썼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습니다.
내가 그동안 물심양면으로 투자했던 인간관계를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러한 노력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좋은 사람들과 편안하게 서로 삶을 공유했던 것들이 어느 순간부터 의무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좋은 사람이라는 가면 뒤에 숨어, 나의 못남과 부족함을 들키지 않으려고 한 것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나의 나쁜 점들이 우리의 관계를 망쳐버릴까 두려웠던 것이겠지요.
진짜 좋은 관계란 서로가 부족할 때 빛을 발하는 것이라는 문장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 문장을 읽고도, 여전히 '좋은 사람'으로만 남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봅니다.
남편이라는 이름의 베스트 프렌드
그런데 새롭게 가정을 꾸려 배우자와 함께 살다 보니, 세상에 이렇게 좋은 친구가 또 있나 싶습니다.
내가 가끔 주말 아침에 일어나 이를 닦지 않아도, 회사에서 기분이 나빠 성질이 버럭버럭 날 때도, 심지어 눈물 펑펑 쏟으며 크게 싸울 때에도 왠지 모를 편안함이 있습니다.
#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사람은 마지막까지 내 곁에 있을 거야.'
이런 안도감 속에, 부족함을 감추려 애쓰지 않아도 되는 관계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내 부족함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같이 개선해나갈 수 있는 진짜 "내 편"이 주는 안락함은 부모님의 열정적인 지지와는 다른 마음의 평화를 가져왔습니다.
주된 스트레스 해소 창구 중 하나가 남편과의 대화입니다.
누군가의 뒷담화나 회사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안주 삼아 물고 뜯고 씹다보면, 어느새 까스활명수 한 병 마신 것 같은 시원한 감정이 샘솟습니다.
마음에 켜켜이 얹혔던 불편한 감정들이 지지, 반대, 설득하는 말들을 통해 해소가 됩니다.
세상에 이렇게 솔직할 수 있는 대상이 또 있을까 생각해보면, 정말이지 남편은 너무나 소중한 베스트 프랜드입니다. (물론 남편도 제게 마찬가지겠지요.)
그렇게 우리의 관계가 익어갈수록, 그동안 강박처럼 가져왔던 '좋은 사람'의 타이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용기도 생깁니다. 내가 당장 좋은 사람이 아니어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쉽게 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좋은 관계를 만드는 것은 나만의 노력이 아니라, 부족함을 서로가 함께 보완할 수 있을 때 가능합니다.
괜찮은 여자로 산다는 것.
물론 이제는 남편이 된 이 남자에게도 예쁘게 보이고, 좋은 아내의 모습을 보이고, 똑똑한 여성으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 노력하며 그 과정에서 성장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점점 성장하는 나의 모습을 부부가 함께 목격하는 것은 정말 신나는 일입니다.
작은 사건들에서부터 새로운 의미를 깨닫고, 인생의 물음표에 하나하나 느낌표를 채워갈 때 비로소 부부완전체로 살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 "언니, 결혼하고 내가 많이 달라진 것을 느껴. 집에서 남편과 같이 시간을 보내면 진짜 아등바등했던 인생에 쉼표가 생기는 기분이야."
# "그치. 살면서 생기는 크고 작은 오해를 당장 풀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서, 좀 더 먼 거리에서 조망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것 같아."
아마 이렇게 달라지는 내 모습이 예전의 나를 바라보던 사람들에게는 조금은 낯선 모습일수도 있습니다.
내가 아주 일부의 모습만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남편에게 보여줬던 부족함을 용기내어 드러내고, 또 그것을 극복하는 모습을 함께 솔직하게 공유하고, 지지하고, 반대하기도 할 때 진짜 괜찮은 여자의 좋은 관계가 시작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