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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은솔 Mar 28. 2018

직원과 아내 사이.

지금 이 자리를 살라.

꽤 오랜만에 글을 쓰려고 키보드 위에 손을 얹습니다.

결혼 이후의 삶에 대해 글을 쓰려고 할 때 가장 먼저 쓰고 싶었던 글감이 이제야 글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한동안 바빴다며 나태하고 기만적이었던 정신과 육체의 탓을 돌리지 않더라도, 이 주제는 결혼 5년 차 아내이자 7년 차 직장인인 '노은솔'에게는 쉽사리 정리가 되지 않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 부부는 야근이 꽤 많은 편입니다. 서로 하는 일은 다르지만 둘 다 프로젝트를 기반으로 수행하는 업무가 많아서, 일이 몰릴 때는 스트레스와 업무강도가 상당합니다. 


그중 저는 프로젝트 후반부로 갈수록 신경이 몹시 예민해집니다. 한 치의 오차 없이 수행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눈이 빠지게 PC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밤 10시나 11시가 되어서야 정신을 차리는 일이 수두룩합니다.

이렇게 한 두 달가량을 피폐한 상태로 생활하다 보면 눈썹이 늙는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게 되지요.

그런데 우습게도, 이렇게 피폐한 정신 속에 항상 불편한 구석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반 평 남짓한 책상 앞에서 끈덕지게 앉아 일을 하다가도, 문득 집안에 비어있을 아내의 자리가 생각납니다. 

# 남편은 오늘도 내가 없어 저녁을 대충 때우는 걸까?

# 얼른 들어가서 분리수거해야 하는데.

# 주말엔 가족과 함께 보내고 싶은데, 회사에 나와서 마무리해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나니, 이제는 남편의 사이클이 돌아왔습니다.

회사를 출근하는 것인지, 집으로 출근을 하는 것인지 경계선이 모호해진 패턴을 바라보면 애처롭다가도 문득 그도 나와 같은 고민을 할지 궁금해집니다.

# 저 사람도 일하다가 문득, 저녁 설거지나 화장실 청소 걱정을 하고 있을까?

일 할 때는 프로답게 그러지 말았으면 하면서도, 또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고 하면 불같이 화가 날 마음.

저는 아직도 회사와 가정의 자리, 또 남편과 아내의 자리에서 이중적인 잣대를 들이밀고 있습니다.



사소한 이 문제를 확장시켜 보면, 인생의 우선순위를 두는 것까지도 연결이 됩니다.

워라밸이 보장되는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제가 서있는 도심에서는 일과 가정의 양립이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어느 한쪽을 적당히 포기하면 된다지만 30대의 혈기왕성한 저로서는 그것도 썩 내키지 않거든요.


그러다 보니 걱정거리가 쌓입니다. 

몸뚱이는 하나인데 양 쪽의 자리에서 내 손길을 기다리는 것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회사에 있으면서도 집 걱정이 되고, 집에 있는데 회사일이 걱정됩니다. (아마 출산과 육아를 병행한다면, 걱정거리는 더 추가되겠죠. 혹시라도 아픈 가족이 있다면 더 할 겁니다.)

여기까지 들여다보신 분들은 눈치채셨겠지만, 이 모든 염려는 우선순위의 부재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번민은 과중한 노동이나 번아웃 증후군으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기 부지기수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여전히 우선순위를 매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많은 책들은 제게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인생에서 중요한 가치를 꼽으라고 말합니다.

아마 당장 내일 죽는다고 하면 일, 사회, 명예, 돈은 제게 큰 의미가 없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별다른 사고 없이 앞으로 50년을 더 살아간다면? 정말 이 모든 것들이 긴 인생의 궤적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솔직히 우선순위를 정할 수가 없습니다.(정하면 편할 텐데요.. T.T) 내일을 기대하는 오늘의 삶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이렇게 직원과 아내의 사이에서 번민하며 살 것이냐.

오랜만에 읽었던 유명한 스님의 말씀 한 구절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제 마음을 달래보기로 했습니다.

"사람들은 앉아있으면서 일어날 생각을 해요. 일어나면 걸어갈 생각을 하고, 걸어가면서 도착할 생각을 합니다. 그저 앉아있을 때는 앉아있는 것에 집중해보세요. 다음 일은 다음에 일어나도록 그냥 두시면 됩니다."

조급함을 잠재우기 위한 방법으로, 지금 서있는 그 자리에 집중해 보는 것.

그렇게 매 순간을 살아간다면, 더 나다운 방식으로 내 삶의 순위가 결정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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