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부터 어딘지 시적인, 은유 작가의 에세이 집이다. 최근 한국에서 에세이들이 유독 잘 팔리는 흐름이 있다고 하는데 나도 그 흐름에 동조하고 있는 중이다. 에세이를 읽으며 다른 사람의 생각에 공감하고 아름다운 문장에 감동할 수 있는 부분이 에세이 읽기를 즐겁게 만든다.
은유 작가가 말하는 올드걸은, 나이 들었지만 여전히 감수성 주체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하나의 삶의 방식이다. 피부 탄력에 신경쓰고 명품을 사랑하는 '영우먼'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존재하는 것처럼, 눈가의 물기와 사유의 탄력을 잃지 않는 '올드걸'이 되고자 하는 욕망도 있다고 말한다. 엄마가 된 사람들, 40대, 50대 그리고 그 이상의 여성들이 시를 즐기고 문학을 읽는 감수성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걸 나조차도 모르고 살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엄마가 되는, 아줌마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바로 그런 거였다. 내 자신을 잃게 될 거라는 두려움. 지금 즐기고 느끼는 것들이 사라질 것에 대한 거부감. 하지만 30대 후반-40대의 은유 작가의 글에서 나는 그런 두려움 대신 나도 올드걸로 나이들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다. 게다가 글은 어쩜 이렇게 잘 쓰시는지. 읽는 내내 즐거웠다. 다음은 올드걸의 시집에서 내가 좋았던 문장들이다.
동네 꽃집을 지나는데 창문에 예쁜 글씨가 새겨져있다. ‘우리 엄마도 한 때는 소녀인 적이 있었답니다.’ 발걸음이 멎었다. 뭐랄까. 애잔함과 서글픔과 허탈함이 차례로 밀려왔다. 매년 어버이날이면 애들한테 카네이션 달라고 조를 때는 언제고 저 문구에 쓰인 우리 엄마에 나도 해당된다는 사실이 인정하기 싫었다. 어느 덧 내가 효(孝)마케팅의 판촉 대상으로 위로받는 처지가 된 게 못마땅했다. 그럼 뭐 지금은 시들었어도 예전엔 생기어린 꽃이었다는 건가? 고쳐주고 싶었다. ‘우리 엄마는 지금도 소녀일 때가 있답니다.’
'밥 먹는 곳에 책 좀 늘어놓지 말라'는 그의 말이 그렇게 싸늘하고 서러울 수가 없었다. 식탁이면서 식탁이 아니기도 했던 모호함이 나에겐 숨구멍이었지만, 정리벽이 있는 그에겐 매끈히 정리해야 할 간척지였다.
나는 은근히 철학을 겸비한 글쓰기를 하려고 욕심내고 있었다. 한 번에 다 이루려는 전형적인 초보자의 조급증.
타자를 변화시키는 힘은 계몽이 아니라 전염이다.
우리가 먹은 카페라테 거품처럼 부드럽고 치즈케이크처럼 촉촉하고 달달한 사랑을 기다리면, 사랑은 영원히 없다.
사귈때는 월급 아니라 연봉에다 덤으로 심장이라도 끼워 줄 것 같다가 헤어지면 카드 할부금 걱정부터 하는 게 인간의 사랑이다.
누군가 나에게 올드걸의 정의를 묻는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돈이나 권력, 자식을 삶의 주된 동기로 삼지 않고 본래적 자아를 동력으로 살아가는 존재. 늘 느끼고 회의하고 배우는 '감수성 주체'라고.
때론 날이 서있기도 하고, 떄론 한없이 따뜻하기도 한 에세이였다. 작가님도 되게 좋은 사람일 것 같은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