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평화로운 수요일 아침 아니 새벽 우리 집에서 가장 먼저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은 젊은것들도 아닌 엄마다. 주방에서 들려오는 도마와 칼날의 아름다운 하모니가 핸드폰의 기계음보다 먼저 나를 깨운다. 습관적으로 핸드폰에 손을 가져가 시간을 확인해 보니 나는 인생에서 한 시간이라는 시간을 벌었다. 엄마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기 위해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며 생각한다. 지금 엄마가 어떤 표정과 마음으로 요리를 하고 계시는지.
우리 아빠의 흉 아닌 흉을 보자면 아빠는 가부장의 끝판왕이시다. 그렇게 된 이유에 대해서 또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성장 배경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능하다. 우리 집은 경원이 씨이고 지금은 인천이 씨로 알려져 있다. 네이버 포털에 검색하면 나오는 집성촌 중 하나가 매년 내가 설과 추석이면 들리는 곳이다. 내가 어렸을 적에만 해도 제사는 한 달에 한번 꼴로 있었고 추석과 설에는 모셔야 할 조상이 어찌나 많은지 한 달 내내 제사를 지내야 했다. 요리는 큰엄마가 진두 지위하셨고 큰아빠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그런 생활이 이어졌다. 큰엄마는 천주교를 믿으시며 제사 프리 선언을 하셨고 우리 모두 큰엄마의 공로를 알고 감사함을 알아 제사가 사라졌다. 그럼에도 어째선지 큰엄마는 설과 추석에는 꼭 제사 음식을 차리신다. 아빠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지만 않으셨다면 아빠는 단식투쟁까지 벌여가며 제사는 해야 한다고 밀어붙였을 것이다. 평생 산에서 살며 조상들의 묘를 관리하고 제사 음식을 운반하는 게 주 업무인 산지기 아저씨도 있었다. 아빠는 이런 집안에 막내아들로 태어나신 분이다.
국민학교 시절 아빠는 등굣길 하굣길에 단 한 번도 책가방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하신다. 그 촌동네 유일하게 각 가방을 가지고 있는 건 아빠뿐이었고 동네 아이들은 각 가방을 들어 보겠다며 너도 나도 아침 댓바람부터 아빠 집에 줄을 서곤 했다는 것이다. 중고등학교에 올라가서도 교복이 두벌 이상 있는 사람은 전교생에 아빠뿐이었다. 최근에 들은 아빠의 만행 중 하나가 교복인데 지난 설에 큰엄마가 말씀하시기를 결혼해서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가 큰엄마에게 와서 교복을 다리라는 미션을 준 것이다. 아빠는 자기만의 룰이 확실하신 분이라 교복에도 룰이 있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칼각. 바지 앞에 올라오는 칼주름은 아빠가 포기할 수 없는 자존심이자 자신을 인싸 반열에 오르게 하는 챠밍 포인트였다. 큰엄마는 아무 생각 없이 아빠가 만들어놓은 깊고 선명한 칼주름 옆에 신생아 주름으로 친구를 하나 더 만들어 버렸고 그걸 본 아빠는 극대 노하여 큰엄마 보는 눈 앞에서 고함을 치며 교복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그 어려운 시 절에 말이다. 독불장군도 울고 갈 안하무인이 그 당시 우리 아빠였다. 쓰러지기 전까지도 말이다.
아빠는 무뚝뚝하신 분이시지만 내가 중고등학교에 들어가자 교복을 항상 다려 주셨다. 물론 내 교복 앞단에는 공기도 가를 듯한 칼주름이 생겼고 유행이 돌기를 간절히 희망했지만 뿌듯한 아빠의 표정과는 다르게 부끄러움은 항상 내 몫이었다. 이런 주름을 소유한 바지는 전교에서 교감선생님과 나뿐이었다. 교단을 산책하다 교감샘을 만나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시며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는 눈빛으로 내 어깨를 가볍게 툭 한번 치고 가실 때마다 속으로 아버지를 외치며 절규했다. 이렇듯 세상에 중심은 곳 태양도 아닌 국가도 아닌 아버지 본인이셨다. 쓰러지신 후에도 자신과의 룰과 변한 세상 간의 간극을 어떻게든 이겨 내고 계시다. 그럼에도 아빠가 아직까지 절대 포기 못하는 한 가지 아침밥인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걸 어떻게 해서든 증명을 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게 단순히 오늘도 폐기능이 정상이군 하며 난 오늘도 숨 쉰다 고로 존재한다 같은 말이 아니라 고양된 성취감이라 던가 나에게 부양된 책임감이라 던가 각자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증거들은 너무나도 다양하고 복잡하다. 가령 길고양이에게 밥을 할당하는 일명 캣맘이라 불리는 분들에게 그 행위는 살아 있다는 증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이처럼 단순 명료하면서도 그 복잡함이 심해와 같아 끝을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사람이다. 그렇다 이쯤 되면 눈치채셨을 것이다. 아빠에게 살아 있다는 증거가 바로 아침밥을 얻어먹는 것이다. 아빠는 10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지신 후에 반신이 말을 안 들어 거동이 불편하신 와중에도 한쪽 발을 질질 끄시면서 왕복 4시간씩 지하철 버스를 오가며 출퇴근을 하신다. 천운인지 능력이 출중하신 건지 아니 둘 다겠지만 이런 불황 속에서도 아빠는 일 나갈 곳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그로 인해 내가 아침밥을 얻어먹을 수 있는 당위성이 생김에 감사해하신다.
면역력이 예전 같지 않아 코로나에 걸리면 정말 어떻게 되실 수도 있어서 나는 몇 번이고 일을 그만두시는 걸 간곡히 청했지만 아빠는 그럴 때마다 그럼 아침밥 해달라고 할 명분이 없다고 메아리만 친다. 아빠도 본인이 코로나에 걸리면 이제는 정말 끝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계신다. 누구보다 사는 것에 집착하셨던 분이 고작 아침밥 하나로 보이지도 않는 탄저균의 공포를 이겨 내고 생사의 출퇴근 길을 감행하는 걸 보고 있으면 정말이지 복잡하고 심오하다. 물론 그 하나만의 이유는 아니겠지만 나로서는 알지 못한다.
아빠 엄마의 이야기를 하면 정말이지 끝이 없다. 다시 아침으로 돌아와서 거실로 나와 엄마의 뒷모습을 보니 역시나 엄마는 온갖 귀여운 욕설을 퍼부으며 분노의 칼질을 하고 계신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냐며 누구는 출근 안 하냐며 나도 한 시간 더 늦게 잘 수 있다며 우리 테스형 노래 하나 틀어 놓고 삭히는 중이셨다. (나훈아 선생님 감사합니다. 한 가정의 평화를 지켜주신 큰 공로를 가지고 계십니다.) 물론 엄마도 상차림 프리 선언을 했었다. 지금도 진행 중인데 어째선지 말과 선언은 그리 단호하게 하셨으면서 다음 날 아침만 되면 상을 차리고 계신 게 아닌가. 나로서는 모르겠다. 큰엄마의 제사상과 엄마의 아침상에 상관관계를 그리고 부부란 게 뭔지.
어김없이 같은 시간에 엄마는 아빠방에 상을 내놓고는 부랴부랴 출근 준비를 하신다. 또 어김없이 같은 시간에 아빠는 씻고 나오셔서 상 앞에 앉으신다. 아빠가 원하는 룰 대로 흰쌀밥 그 옆에 뜨끗한 국물 그 옆에 정갈하게 놓인 수저와 몇 첩 반찬들까지 고맙게 드시면 되는데 정말이지 멋없는 우리 아빠는 한마디 건네신다.
"크흠.... 국이 좀 짜네요?..." 아이고 아버지야....ㅠ
엄마는 생각한다. 아니 그럼 손이 없어 발이 없어 누구는 출근 안 하나 피차 바쁜 시간 쪼개가며 밥해 준 것만 해도 감지 덕지 생각해야지 진짜 사람 인생이 불쌍해서 진짜.... 아오 하시며 이미 엄마는 물컵에 물을 조금 담아 아빠 옆에 쿵하고 물이 거의 세상 밖으로 튕겨져 나가기 직전까지 극한에 미세한 근육 컨트롤로 내려놓으신다. 아빠는 한 건 해냈다는 득의양양 한 표정을 보니 만족하신 듯하다. 설마 엄마의 저런 반응 보시자고 하루하루 라이언일병을 자처 하시는 건 아닐 건데... 모르겠다. 나는 그냥 두 분이 너무 귀엽당. 오늘도 평화로운 우리 집 수요일의 아침으로 나는 독심술에 대가가 되어 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