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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진 Feb 02. 2021

화요일

단순 일기


화요일



                나는 요 몇 주 꽤나 바쁜 나날을 보냈다. 우선 집안에서의 직위로서의 책무를 다해야 했다. 동생이 취직을 하여 집을 알아봐야 했고 신세대라 할 수 있지만 아날로그와 접점이 없는 세대도 아니다. 과거의 향수가 짙게 남아 있는 사람이기에 발로 매물을 찾아다녀야 했고 작은 짬에는 핸드폰으로 매물을 찾았다. 다행히 동생과 내 마음에 맞는 집이 있어 계약을 했고 동생의 이사를 도와줘야 했다. 없는 형편에도 처음으로 출가를 하는 동생에게 뭐 하나라도 더 해주고 싶어 무리를 해서 스피커를 사줬다. 나와는 다르게 음악적 취향이 독특하고 확고한 아이라 그런 다름을 민감하게 받기에 다름을 위해 애쓰는 음향기기 브랜드 제품을 주문했다. 이런 부분들이 인생을 영위하는데 필수 요소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코로나가 조금 누그러져 재택근무가 끝이 났다. 몇 개월 만에 출퇴근을 하려니까 죽을 맛이었다. 정말이지 지금까지 난 어떻게 삼성역과 수원을 이리 무감각하게 다녔는지 지난날의 내가 너무 그립고 대견했다. 사람은 간사한 동물이라 금방 적응하리라 믿지만 지금 당장은 퇴사만이 답이다. 그래서 그런지 항상 어떤 적정 수입원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내가 본업 외에 일을 몇 가지를 더 했다. 그리고 글에 관련된 공모전을 몇 가지 제출했다. 또 브런치 라디오 2기 공모전에 당선되어 라디오 대본에 맞게 글을 다시 써야 했다. 당선만 되면 끝인 줄 알았는데 근 한 달간의 유예기간 안에 글을 써서 보내야만 한다. 어떤 효율면에서 아주 아주 가볍게 생각하기에 그에 맞는 시간과 노력을 들일 거라 예상된다. 나는 생각보다 계산적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사람들은 내 외향을 보고 어떤 정형화된 이미지를 멋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또는 내가 유도했나 보다. 나는 그다지 착한 편도 아니고 악한 편도 아니다. 예를 들자면 보기 좋은 꿀떡인 줄 알고 먹었더니 웬 떡 안에 역한 취두부가 들어 있는 게 아닌가. 믿었던 떡에게 배신당한 기분이 들것이다. 그딴 떡을 만든 사람에게 화풀이를 해야 할까, 쓸데없이 이쁘게 만들어진 떡에게 성질을 내야 할까. 애초에 떡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면 어떨까. 허공의 공기를 누구는 꿀로 누구는 취두부로 느낀다면 잘못은 누구에게 있는가 잘못이 있기는 할까. 여하여튼 내가 취두부를 싫어해서 그런 건 아니니 오해 마시길.


브런치라는 공간은 나에게 어떤 강압적인 공간은 아니다. 스스로의 속박 같은 것이지 외압에 의해서 운영되는 곳은 아니다. 그럼에도 스스로 꽤 강력한 주문으로 속박을 걸었다 생각했지만 내가 가진 벼슬들의 직무가 차례차례 몰려오자 그들은 미리 줄 서고 있던 녀석에게 거칠게 새치기를 해댔다. 누구 하나 불편하게 하는 일은 아니라 여기지만 나에게 다소 놀랐던 부분은 새치기당하는 녀석을 보고 있는 주인의 심정이다. 주인의 음중이 잔인하게도 태연한 걸 보면 강력한 주문을 걸었다 호언장담했던 술사의 능력 미달이거나 너무나도 강력했던 대상을 과소평가했다는 사실로 이른다. 미리 줄을 섰다 해서 VIP 고객은 아니었다는 뭐 어차피 다 똑같은 말이다. 그럼에도 항상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절대로 사라지지는 않는다.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작가나, 모델, 디자이너, 등등 이런 직업군은 본인에 입으로 말하는 순간 가치가 기하급수적으로 하락한다. 누군가의 인정이 수반되어야 비로소 직업으로서 의미를 하사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불특정 한 개인들에게 의미라는 걸 피어 내야 하는데 이게 쉬우면서도 어려울 수 있는 문제다. 이를테면 김중만이 호텔에서 내려다본 갈라진 수영장 한가운데 비집고 나온 풀을 보며 자신의 의미를 오버랩시킨 것처럼 말이다. 길가에 나가보면 사방에 널린 게 풀이다. 그 풀만 유독 빼어나게 이뻐서 의미를 지니게 된 게 아니라는 말이다. 의미란 거는 일방적이고 주관적인 것이라 길가에 널리고 널린 돌멩이 하나가 유독 나에게만큼은 인생에 어떤 진리를 깨닫게 해 주었다면 또는 인생이란 영화에 스모킹건 같은 역할이을 해 냈다면 이건 남들이 보았을 때는 사방팔방에 널려 발을 거슬리게 하는 돌부리지만 나에게만큼은 이미 수석에 가치가 있는 물건이 된다. 어찌 되었든 간에 발이든 손이든 눈이든 마음이든 채이는 곳에 널려 있어야 한다. 내가 지금 서 있는 요즘 시대는 그런 의미에서 최고이자 최악의 시대다. 내가 가진 취향이란 거 유일하고 독자적인 것 같지만 있다는 전재에서 이미 넌센스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난 요즘 고민이 아주 많다. 효율적인 방법론과 단순히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닌 왜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은지의 자문자답을 조깅을 하며 수도 없이 되뇌고 있다. 스스로 꼴 사납지 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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