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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J Jan 06. 2019

기술에 대한 염려 - "기술은 인간에게 이로운가?"

#기술과자본 #가속화 #기술과인간 #우버 #페이스북 #구글 #독점금지법



구글의 CEO 선다 피차이는 항상 질문한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무엇이 다른가?” 


기술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인류가 자연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을 만들어 내는 어떤 것을 모두 기술이라고 생각하는 관점을 채택한다면, 인류가 스스로 불을 지피고, 언어라는 약속된 체계로 소통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인류의 역사 상 기술적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은 시기는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지금도 새로운 기술적 발전을 염려하는 것일까? “그래서, 이번에는 무엇이 다른가?”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문제는 속도라는 피차이의 의견에 동의한다. 그리고 그 원인은 자본주의라고 덧붙이고 싶다. (나아가 우리 사회에서 이에 대한 수많은 문제제기가 발생하는 이유는, 어쩌면 개인적으로는 도무지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두 사상,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피차이의 말대로, 우리는 기술에 ‘과잉-의존’하여, 기술적 발전이 인류의 문제를 해결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무언가 이상한 기분이 들자, 다시 기술을 모든 문제의 근원으로 '과잉-비난'한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 자체가 기술이 늘 통제가능한 도구에 머무를 것이라는, 인본주의의 뿌리에서부터 근원하는 인류의 자만심일지 모른다. 우리는 인류세가 도래한 현 시점에도, 여전히 기술-인간과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이데거는 기술이 점점 더 빠른 속도로 기능하게 될 것이고, ‘기술성’은 인류의 통제를 벗어날 것이라 예측한 바 있고, 시몽동 역시 기술적 대상들이 개체화되는 과정에서 그만의 기술성에 대해 논한바있다. 하지만 기술결정론-사회구성주의의 대립, 혹은 생산성의 증대에 대한 무한한 환영, 혹은 무조건적인 발전을 부추긴 근대 학술적 장의 체계, 혹은 다른 수많은 이유들로 인해 우리는 기술 발전이 인간과 우리의 삶과 그 삶의 터전인 행성에 양면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인지하는데 실패해온 것 같다. 


특히나 초산업화와 소비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기술의 방향은 자본과 그에 의해 조작되는 욕망에 의해 결정되어 온 것은 아닐까. 의식의 도식이 산업적 미디어에 대해 침탈 되면서, 모든 인간 삶의 행태는 ‘프로그램’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단순화되고 있고, 데이터로 환원되며, 다시 그를 활용해 자본의 극대화를 위한 방향으로 유도되고 있다. 자본주의가 부추긴 자본에 대한 갈망과 소비의 욕망은 우리의 환경을 위협하게 되었다. 산업화 시대 초기에 컨베이어 벨트가 장인들을 대체하며 인간을 탈숙련화로 제품으로부터 소외시켰다면, 우버는 택시 시장에 본인 차를 들고 띄어드는 일꾼들을 대량 늘려 동일한 마켓 내에서 파이를 줄여놓고 그 이익은 독점한다. 정치적 세력은 그러한 기술을 활용해 인간의 의식을 지배하며, 결국 권력=자본인 자본주의 체제내에서 권력을 대물림한다. 개인의 개체성은 점차 소멸되고, 대중은 사회 속의 아무나(one)가 되어버리지만, 기술의 통해 더욱 공고해지는 신자유주의는 시장의 이익에 복무하기 위한 끊임없는 경쟁을 요구한다. 이 모든 것의 결과, 진정한 공동체가 사라진 극단적으로 양극화되는 사회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이렇게 보면 마치 기술이 세상을 쓰레기로 만들어버린 것 같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단지, 독이 될 수도 약이 될 수도 있는 기술의 파르마콘적 성격을 인지해야 한다는 것이고, 근대 사회가 채택한 인본주의의 특정 방식 아래에서 기술의 방향이 자본에 의해 좌우되며, 그 속도 역시 주체할 수 없게 빨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 세대가 아직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도 못하는 기술적 발전의 양상을 통제하기 위해 인터넷이 존재하기도 전에 만들어진 독점금지법(경쟁의 부재로 인한 소비자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법)에 의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데니스 헌은 현재의 독점금지법 해석이 너무 구식이라, ‘소비자 복지’ 개념에 대한 리부트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조금 더 사회전반에 걸친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기술적 조건 및 정치경제적 조건에 대한 비판적 개입을 통 해서 생물학적 생존을 위한 충동과 욕구 차원을 넘어서 인간적 실존을 위한 삶의 양식을 만들 어 내는 것이 오늘날 긴급하게 요청된다는 스티글레르의 의견처럼, ‘과연 인류 전체를 위해 이로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대중의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동시에 한편으로는, 다행히 (한국의 경우는 잘 모르겠지만, 외국 기사에서는) 디지털 네이티브인 요즘 청소년들은, 인터넷과 스마트폰과 여러 기술적 발전에 감탄하기 바빠 페이스북과 구글과 아마존을 키워낸 우리 어른들 보다 자연 환경을 더욱 생각하고, 기술적 생태계에 더욱 비판적이라 던데, 이들의 자정능력에 기대어 보고 싶은 마음이 크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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