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준성 Nov 16. 2023

백마리 개, 에게 실수하지 않는 법

16. 나는 그렇게 시작했었다.

말할 수 없어 고민을 한다. 언어가 아닌 것으로 전달할 방법을 찾는다. 손짓 발짓을 해보지만 결국 언어의 연장선에 불과하다. 사람이 사람에게 보였던 몸짓이 개에게 통할리 없다. 뒤집어 생각한다. 개의 몸짓을 익혀 따라 해본다. 카밍시그널이라 부르는 매뉴얼을 습득해 본다. 그리고 깨닫는다. 상대를 이해하려는 마음 없이는 무슨 짓을 해도 전달되지 않음을.




비오는 날 사료 젖지 말라고 만들어봤다.


아프다.


다투는 개들을 지켜본 적 있는가? 다툼이 일어나는 즉시 말리기 바빴을 것이다. 가만히 바라보는 일은 여러분 평생에 없을지도 모른다. 개들의 다툼은 짐승의 싸움으로 비친다. 약육강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소개되기도 한다. 그래서 개들이 이토록 아프다.


말싸움과 주먹다짐을 구분할 수 있는가? 당연한 말이지만 쉽게 구별할 수 있다. 상대방 어깨를 두들겨 불러 세우는 동작과 상대방의 얼굴을 가격하는 동작은 구분할 수 있는가? 아마 이것도 식은 죽 먹기 일 것이다. 장난치는 개와 다투는 개는 어떤가? 열에 아홉은 이 두 가지 상황을 구분하지 못한다.


우리는 개만 키웠다. 세 마리를 키우더라도 마찬가지였다. 한 마리씩 세 번을 돌볼 뿐이었다. 개가 아닌 개들을 키운 적은 없었다. 사람들은 개가 개를 만나는 순간을 경계한다.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긴장한다. 가능한 피하고 싶은 순간인 것이다. 개가 개를 만나는 일에 절차와 조건을 붙인다. 방송에 나온 전문가들도 그리 말한다. 한 공간에 열 마리 개가 있어도 개들이 되지 못하는 이유이다. 당신의 한계에 갇혀 아플 수밖에 없다.




나와 개들, 서로 노력했다고 말할 수 있다.


당신, 연습


애견훈련은 단연코 쇼에 불과하다. 어디선가 본 훈련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은 불가능이다. 연습이 필요하다. 아무 연습도 하지 않은 사람의 손짓이 개에게 영향을 줄리 없다. 옹졸한 몇몇은 개의 탓으로 돌린다. 개의 지능이 낫거나 혹은 버릇없이 키워서 훈련이 되지 않는다고 변명한다. 최소한의 연습도 하지 않은 이의 자만심에 우리 개들은 또 한 번 상처 입는다.


시간이 없다. 애견훈련을 위해 당신이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은 적다. 나아가 공간도 없다. 당신이 사는 집은 훈련소가 아니다. 퇴근 후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하루이다. 출근 없이도 하루 일과는 여전히 빼곡하다. 만약 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고 하더라도 가장 큰 문제가 남아 있다. 애견훈련에 있어서 당신만 준비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개도 준비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개 앞에서 당신의 손짓은 쇼에 불과하다.


방문훈련을 했었다. 받은 것이 아니라 내가 훈련을 나갔었다. 1년이 지나고 그만두었다. 개를 키우는 사람들에게 실망이 컸었다. 모두는 아니었다. 허나 대부분이었다. 개로 인한 사람의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해 돈을 지불할 뿐이었다. 개를 이해하는 노력도 그 돈으로 매수했다. 오해를 하고 있다. 영상이나 책을 보는 것만으로 개를 이해할리 없다. 이해하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당신은 지금 연습을 해야한다.




비 맞는 개에게 보금자리가 생겼다. (왼쪽 백구)


시작하는 일


개는 사랑으로 키우지 않는다. 사람들은 반박한다. 개는 사랑을 먹고 자라는 동물이라 말한다. 사랑은 이기적일 정도로 일방적인 행위이다. 연인 간의 흔한 다툼에서도 일어난다. 너를 향한 내 진심을 왜 몰라주냐고 묻는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라고 답한다. 영화, 드라마에서 여러 번 봤을 법한 대화이다. 개를 향한 우리의 사랑은 일방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개는 사랑이 필요하다. 즉, 개가 필요로 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명확히 개가 필요로 하는 것은 알고 있다. 이제 그것을 개에게 전달해 주면 된다. 아주 간단한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막힌다. 사랑을 전달하는 방법을 모른다. 내가 구입한 애견용품이 사랑이었을까? 내가 시간을 내어 산책을 시켜주었던 것이 사랑이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개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얘네들이다…


9년 전 슈나우저 가족 3마리가 왔었다. 침대 아래 숨어 나오지 않았다. 근처만 가도 물 것처럼 사납게 짖어댔다. 그때 했던 나의 생각이 지금도 나를 웃게 만든다. 물려고 덤비는 개를 보고서는 이렇게 생각했다.


저 개가 지금 무는 짓을 너무나도 하고 싶구나.

내 오른손을 침대 밑으로 쑥 집어넣었다. 기억나지 않지만 약 3초 정도 버텼던 것 같다. 물리고 또 물린 오른손은 난리가 났고, 그때부터 왼손으로도 젓가락질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깨달은 것이 있었다. 사나운 개라고 하더라도 누군가를 물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내 오른 속을 물어뜯었음에도 여전히 사나웠으니 말이다.




어려울 것 하나 없다. 개를 개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된다. 말 못 하는 짐승이나 소통할 수 없는 동물이 아니다. 아직 서로에 대해 잘 모르는 상대방이다. 키우는 개에 대해 잘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자존심이 꽤나 상할 거다. 허나 그것이 첫걸음이다. 무조건 개의 편이 되어보자. 나는 그렇게 시작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백마리 개, 죽일 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