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컴컴한 새벽, 밝아오는 여명과 함께 우리는 폰페라다를 뒤로하고 산티아고를 향한 여정을 시작했다. 셋 중에서 나이가 가장 많지만 컨디션이 좋은 크리스티앙이 앞서 가고 키캐와 나는 뒤에서 천천히 걸어간다. 크리스티앙은 우리가 그의 곁에 다다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치 새로운 순례자를 만난 것처럼 인사를 건넨 뒤 키캐에게는 분홍색 꽃을, 나에게는 노란색 꽃 한 송이를 내민다.
"아란! 디스 이즈 포 유."
꽃보다 향기로운 그의 마음을 가득 담은 꽃을 귀에 꽂았다가 부토니에처럼 가슴에 고이 꽂고 걸어간다. 보라색 점퍼와 노란색 꽃의 조화는 꽃을 더욱 빛나게 했다. 내 인생은 마치 두 사람이 나비처럼 살포시 앉은 꽃과 같았다. 함께 하면 정말 좋은데 왜 나는 두 사람을 밀어내려고 했을까?
높은 하늘에 흩어져 있는 구름 사이로 햇살이 살포시 비쳐들고 땀이 조금씩 흐르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발걸음은 점점 느려졌다. 키캐도 발걸음이 느려지다가 이내 걸음을 멈춘다. 어쩐지 키캐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키캐 무슨 일이야?"
"무릎이 너무 아파서 좀 쉬었다가야 할 것 같아."
키캐에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우리는 잠시 그늘 아래에서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고 숨을 고르기로 했다. 뜨거운 여름바람에 땀에 절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찰싹 달라붙어 살짝 불편했지만 무릎 통증에 비할바가 아니었다. 나는 잠시 멍하니 그늘에 기대어 서 있는데 히라다상이 준 파스가 생각났다.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에 파스를 키캐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키캐, 이거 일본인 할아버지가 주신 매직크림인데 한 번 발라볼래?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근육통이 있을 때 이 크림을 자주 사용하곤 하는데 효과가 꽤 괜찮더라고. 냄새는 조금 낯설겠지만 도움이 될 거야."
유럽인들에게 익숙하지 않기도 하고 키캐는 예민한 성격이라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단 1초의 주저함도 없이 '부에노(좋아)'라고 대답했다. 나는 쪼그리고 앉아 히라다상이 준 '매직크림'을 그의 무릎에 발라주며 키캐의 표정을 살폈다. 낯선 냄새 에 그는 눈썹을 살짝 찡그렸고 나는 그 모습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냄새가 조금 그렇지? 냄새는 이래도 확실히 효과는 있더라고."
"무차스 그라시아스.(정말 고마워.)"
"콘 구스또. 그리고 키캐 이건 보너스야. "
무릎과 바지에 묻은 흙을 손으로 쓱쓱 털어낸 후, 키캐의 뭉친 어깨를 풀어주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크리스티앙이 다급하게 나를 부른다.
"아란! 미라. 미라. (이거, 봐봐.. 이거)"
"크리스티앙! 왜? 무슨 일이야?"
그는 입을 삐죽 내밀며 구릿빛 손가락으로 양쪽 어깨를 가리킨다. 어린아이처럼 어리광을 부리는 크리스티앙의 모습에 키캐는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리스티앙은 키캐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부리나케 내 앞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그는 뒤돌아 내 손을 잡아 살포시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려놓는다.
"아란, 아끼 아끼.(여기, 여기)."
그는 내 손을 잡고 살포시 그의 어깨 위로 올려놓고 고개를 돌렸다.
"아키 아키!! (여기 여기!!)"
크리스티앙 어깨를 주물러주는데 피식피식 계속 웃음이 새어 나왔다. 키캐는 어이없는 미소를, 크리스티앙은 만족의 미소를 짓는다. 야매 마사지사의 서툰 마사지가 끝나고 두 사람과 함께 다시 길을 나섰다. 셋이 함께 걷고 있으니 순례라는 생각보다 오오랜 친구와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다. 키캐도 히라다상이 준 '매직크림'의 매직을 경험한 건지 처음처럼 속도를 내어 걸을 수 있었다. 그렇게 오늘의 목적지인 페레헤에 도착했지만 알베르게는 이미 만석이라 울며 겨자 먹기로 다음 마을로 가야 했다. 알베르게를 나오자마자 키캐를 바라보고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오늘 여기는 안되나 봐.. 괜찮아? 걸을 수 있을 것 같아?"
"아란, 아까 그게 매직크림이라고 했지?"
"응. 같이 걸었던 일본인 할아버지가 줬어. 왜?"
"왜 매직크림인지 알 것 같아. 한 시간은 끄떡없을 것 같아. 약 기운이 떨어지기 전에 얼른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