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아직, 우리가 굶주리지 않는 이유
구독자분들께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새로운 책 작업에 매진하느라 그동안 브런치 연재에 소홀했습니다.
이번에 도서출판 산인과 작업한 <그래도 아직, 우리가 굶주리지 않는 이유 - 곡물과 팜유에서 대체육까지, 어둠 밖으로 나온 식량메이저들의 생생한 이야기> 는 제게 두번째 책이자 첫번째 번역서입니다. 이책의 저자 조나단 킹스맨은 1970년대 후반 전세계 최대 식량기업 카길(Cargill)의 트레이더로 시작하여 농산물 원자재 시장에서 다방면으로 활약하였으며 최근에는 집필활동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조나단에게 연락하여 이책의 번역을 처음 협의하기 시작한 것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이었습니다. 당시에도 이미 식량가격은 높게 치솟아 있었으며 전쟁 발발 이후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습니다. 전쟁과 함께 치솟은 식량가격이 대중들의 관심을 끌었고 여기서 파생된 식량문제와 관련한 여러 논의들이 활발하게 우리 사회에도 형성되는 것을 흥미롭게 지켜봤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책이 제공할 수 있는 가치에 대한 저의 확신도 덩달아 커졌습니다. 저는 이 책이 그 어느때보다 우리 사회에 널리 읽히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이토록 자세히 '비밀스러운' 식량업계의 내부를 정확하게 파고든 책은 제가 알기에 없기 때문입니다. 책 본문에 실린 옮긴이의 말을 책 소개 대신 아래에 덧붙입니다.
치솟는 곡물 가격으로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으로 군함이 가득 메운 흑해에는 곡물을 나르던 상선의 발길이 끊겼다. 인도네시아는 세상에서 가장 값싼 식용유인 팜유 수출을 금지하였고 14억의 인구 대국 인도는 밀 수출을 금지했다. 옮긴이가 살고 있는 싱가포르에도 최근 말레이시아의 닭고기 수출이 끊겼다. 세간에는 金겹살이라는 단어가 등장했으며, 마트에는 식용유 사재기가 일어나고, 옮긴이의 아내는 닭고기를 찾기 위해 한참을 고생하고 있다. 이처럼 세상이 식량문제로 신음할 때면 사람들은 어둠 속에 있는 식량 메이저들을 손가락질하며 광장으로 소환한다.
이 책은 카길의 원당 트레이더로 시작하여 지난 40년간 원자재 트레이딩 업계에 몸담아온 조나단 킹스맨(Jonathan Kingsman)이 2019년 11월에 출간한 Out of the Shadows: The New Merchants of Grain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옮긴이는 이 책을 2022년 2월에 처음 읽고 반드시 국내 독자들에게 소개해야겠다는 결심을 하여 직접 번역에 이르게 되었다.
이 책의 인터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트레이딩, 금융, 해운 등 전세계 식량 산업의 최전선에서 활약한 전현직 CEO, 고위 임원, 트레이더들이다. 저자 조나단 킹스맨은 이들을 어둠 밖으로 불러내었으며, 이들은 기꺼이 이에 응하여 가장 생생한 업계의 목소리를 독자들에게 전한다. 조심스럽게 이 책을 끝까지 읽은 독자라면 현대 식량 산업의 작동원리를 이해하게 될 것이며 그동안 식량 산업과 식량 메이저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 얼마나 무지와 오해로 가득차 있었는지 알게 될 것이다. 또한 같은 문제에 대해 각자 다른 견해와, 책이 세상에 나온 지 불과 2년 반 만에 가장 전문가들이라고 하는 그들의 전망과 얼마나 다르게 현실이 전개되었는가를 살펴보는 일은 흥미로운 작업이 될 것이다. 어둠 속에 숨은 배후의 조종자라는 악명이 칭찬으로 여겨질 만큼 지난 2년 반 세상은 그들의 전망과 다르게 흘러갔다.
이 책에 반복하여 언급되는 1979년은 댄 모건(Dan Morgan)의 명저 Merchants of Grain: The Power and Profits of the Five Giant Companies at the Center of the World’s Food Supply 가 세상에 처음 나온 해다. 조나단 킹스맨이 사용한 원제의 ‘New’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댄 모건의 책이 세상에 나온 이후 지난 40년간의 변화상을 저자는 이 책에 담고자 했다. 이러한 이유로 본문에는 1979년이라는 시점이 과거 비교의 대상으로 자주 언급된다.
옮긴이는 최대한 충실히 원문만을 번역하고자 했다. 다만 곡물 산업에서 사용되는 전문용어, 은어, 개념, 사건 등에 대해서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업계 종사자로서 설명을 일부 각주에 덧붙였다. 곡물 트레이더들은 다양한 은어를 좋아하며 업계에서 자주 사용되는 많은 용어들이 정확한 국문 번역이 어렵다는 점을 번역 작업을 하면서 새삼 느꼈다. 만약 부드럽지 못한 번역이 있다면 이는 전적으로 옮긴이의 부족함 탓이다. 한편 원서에는 저자가 인용한 참고문헌이 충실하게 정리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참고문헌이 영문 웹사이트 링크이다. 그 중 상당수는 이미 유효하지 않다고 보여 옮긴이의 판단에 따라 한국어판에서는 생략하였다. 이에 대한 한국 독자들의 양해를 구한다. 또한 이 책의 본문에는 옮긴이 본인을 비롯하여 옮긴이가 한때 몸담았고 현재 몸담은 어떠한 기관의 공식적인 견해도 대변하지 않는다. 다만 아래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식량문제에 대한 옮긴이의 개인적 견해를 짧게 밝히고자 한다.
전 세계적으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값싸고 안전한 식량을 먹게 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손의 힘을 믿어야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건 정부의 개입이 아니라 자유로운 시장과 그 시장의 참여자들이다. 시장은 자유롭게 놔두어야 한다. 이 책의 본문에서 언급되듯 트레이더들은 지금과 같은 비정상적인 시장의 혼란 상황에서 기회를 발견한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트레이더들이 세상의 혼란 속에서 이익을 본다고 손가락질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기회를 보고 앞다투어 달려드는 시장 참가자들과 그들의 경쟁 덕분에 시장은 빠르게 정상을 되찾고 식량은 가장 효율적으로 배분될 수 있다. 지난 반세기의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지난 반세기간 자유로운 무역과 세계화에 힘입어 전 세계 인구는 38억명에서 79억명으로 두 배 넘게 늘어났고 육류 생산량은 세 배 이상 증가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1970년 곡물자급률이 80.5%에서 2020년 20.2%로 떨어지는 동안 1인당 육류 소비량은 5.2㎏에서 52.5㎏으로 열 배 증가했다. 식량안보가 취약해지는데 왜 우리의 식탁은 더욱 풍성해지는 것일까? 오늘날 더 많은 사람들이 값싸고 안전한 식량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은 세계 각국이 빗장을 걸어 잠그고 농업사회에 머무르며 자급자족을 꾀했기 때문일까? 그래도 우리가 아직 굶주리지 않고 더 많은 식량을 값싸고 안전하게 소비할 수 있게 된 것은 자유로운 시장과 그 속에서 발휘되는 참가자들의 창의성과 경쟁에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여기서 한 발 나아가 더 많은 생산과 효율적인 배분이 과연 정의로운 것인지, 이 과정에서 자칫 간과된 환경문제 등은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답하는 것은 옮긴이의 역량을 벗어나며 폭넓은 사회적 고민이 필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 책의 한국어판 번역을 제안했을 때, 기쁜 마음으로 선뜻 승낙한 저자 조나단 킹스맨은 자신의 인세를 기부해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뜻에 따라 이 책의 저자 인세는 높은 식량 가격으로 허덕이는 사람들의 고통을 나눌 수 있는 곳에 귀하게 사용될 것이다. 세상의 고통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식량 메이저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한국 독자들이 즐겁게 읽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2022년
최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