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잊힌 꿈과, 말할 수 없었던 그 막다른 절망을 생각하며
세상 많은 일에는 빛과 그늘이 같이 있듯이 가사도우미 제도 또한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낯선 타인과 24시간 함께 살아가며 발생하는 문제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중 일방이 훨씬 약자일 때 생기는 문제들을 듣다 보면 어두운 인간의 본성을 생각하게 만든다.
싱가포르에서 고용되는 헬퍼들은 대부분 그들을 고용한 가족과 함께 살도록 되어있다. 인근 필리핀, 인도네시아, 미얀마 등에서 건너와 생전 처음 보는 중국인, 인도인, 서양인, 한국인 가족들과 살게 되는 헬퍼들은 기본적으로 훨씬 약자일 수밖에 없다. 나이도 어리고 경험이 아직 적은 여성이면 더욱 그렇다. 이들은 직업을 얻기 위해 싱가포르로 이주해 오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비용들을 중개소에 빚지고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처음 몇 달 일하며 받게 되는 급여는 이미 빚진 비용을 갚는데 쓰이고 본국에 있는 가족들에게는 몇 달 동안 한 푼도 보내지 못한다.
몸과 마음이 아직 한참 여리고 감수성도 풍부할 시기에 낯선 땅에서 자신의 삶을 24시간 감시하는 사람들과 사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일반 직장인들도 자신을 괴롭히는 상사나 마음이 맞지 않는 동료와 낮 동안 회사에서 열 시간을 보내는 것을 무척 힘들어한다. 하물며 물리적으로 한 공간에서 경계조차 불분명한 퇴근에 기대야 하는 헬퍼들은 어떨까? 자신의 경제권을 온전히 쥐고 있으며 말도 잘 통하지 않고 문화도 전혀 다른 집안에서 온갖 잡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게 얼마나 힘들까? 성범죄의 위협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한 이들은 항상 불안한 마음을 갖고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가끔씩 들려오는 이야기들이 어디 어디에서 헬퍼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다. 사회적 약자인 그들의 위치나, 싱가포르 언론의 특수성 때문에 그런 얘기는 크게 알려지지도 않는다. 그런 점에서 나는 국내 여러 인권단체들이 가사도우미 제도 도입에 대해 표하는 우려를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한다. 매우 타당한 우려이고 필요한 우려다.
그렇다고 싱가포르 정부가 문제를 외면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오랜 기간 이 제도를 운영한 경험이 있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를 처리해 왔기 때문에 관련 부처에서는 상당히 능동적으로 문제의 예방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고용노동부에 해당하는 Ministry of Manpower (MOM이라고 한다)에서는 싱가포르에 필요한 고급 기술을 가진 외국인 인력부터 단순 노동자나 헬퍼들까지 전담하고 있다. 헬퍼를 고용하기 위해서는 MOM을 통해 신청해야 하는데, 신청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MOM에서 요구하는 각종 사전 교육을 이수해야만 한다. 교육 내용 중에는 앞서 말한 문제들을 방지하고, 고용주와 헬퍼가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가 윈윈 할 수 있도록 돕는 생생한 내용들이 담겨있다. 교육만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고용 이후에도 MOM에서는 주요 사안들에 대해 지속적으로 메일을 보낸다. 헬퍼의 건강관리, 휴식 보장, 임금 지불 등에 대해 가이드라인과 경고가 주요 내용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이 모든 구석구석에 닿을 수는 없다. 가족처럼 함께 24시간 사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몇 가지 가이드라인만으로 규정되고 관리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필요한 것은 사랑, 신뢰, 배려, 양보와 같은 마음이다. 그런 마음이 부족할 때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미래에 대한 부푼 꿈을 안고 낯선 땅에 넘어온 가녀린 젊은 처자가 막다른 절망 끝에 스스로 몸을 던지는 비극을 사회가 낳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런 비극이 우리 사회에 잉태되지 않기를 바란다. 촘촘한 제도와 성숙한 사회적 분위기가 뒷받침된다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