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니 이모가 우리 집에 오기까지
동서양의 교차로이자 문화의 용광로라고 불리는 싱가포르지만 인구의 3분의 2 이상은 중국인이 차지하고 있다. 중국인들의 동남아시아로의 이주 역사가 오래된 만큼이나 ‘중국인’이라고 하나로 묶기에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화인(華人)들이 싱가포르 사회의 중추를 이루고 있다. 필리핀에서 온 라니 이모를 처음 만난 곳은 중년의 중국계 말레이시아 아줌마가 일하는 인력 소개소였다.
싱가포르에서 가사도우미를 구하는 가장 편하고 흔한 방법은 이러한 에이전트를 통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반드시 중개소를 거쳐야 하는 것은 아니다. MOM의 지시사항에 따라 얼마든지 본인이 직접 중개소를 거치지 않고서도 가사도우미를 구할 수 있으나, 여러 가지 서류 작업, 신원보증 등에 대한 우려 때문에 이런 일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에이전트를 끼는 것이 일반적이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도 이런 중개소들이 잔뜩 모여 있는 곳이 있었다. 옛날 용산 전자상가처럼 비슷한 가게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쇼핑몰에는 매일매일 봉고차로 새로운 인력들이 공급된다. 기내에 들어갈 작은 캐리어 하나를 들고 봉고차에서 우르르 내린 여성들은 정해진 사무소로 질서 있게 걸어 들어간다. 새로운 고용주를 찾기까지 에이전트에서 마련한 (결국 다 빚으로 갚아야 하는) 숙소에서 단체 생활을 하는 이들은, 어차피 낮 동안 숙소에 있을 수도 없기 때문에 사무실에 나와 잡일을 하거나 아무 하는 일 없이 멍하니 앉아 있으면서 자신을 고용해 줄 사람을 기다린다. 신기한 점은 이렇게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온 여성들을 거느리고 있는 중개사무소의 관리자들은 전부 중국인이라는 점이었다. 서양인은 물론이요, 말레이인이나 인도인도 없는 이 업종은 철저히 중국인이 장악한 것으로 보였다. 다른 일이 있어 그곳을 지날 때면 그 광경이 내 마음에 썩 편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옛날에 노예 시장이 이러한 모습이었을까?
그런 나도 사람을 찾기 위해 그곳을 찾았다. 처음 들른 두어 곳의 가게는 나의 상황과 선호사항 등을 열심히 기록하더니 명함을 주며 적당한 사람을 찾아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마흔이 되어 보이지 않는 다소 느끼한 인상의 중국 남성들이었다. 그러다 마지막에 찾은 가게에서 나는 라니 이모를 만났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니 손톱을 다듬으며 나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왜 퇴근해야 하는데 이제 오냐 꾸중하는 전형적인 싱가포르 안티(auntie)였다. 뭔가 느낌이 왔다. 친절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으나 자기 일을 잘하는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게도 제법 오래되어 보였고 안에 붙어있는 빛바랜 사진들(옛날 손님들)로 보아 그래도 이곳에서 오래 살아남았으면 이유가 있겠지 싶은 마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환갑이 넘었을까 싶은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안티 미스 리는, 원래 집에 가려 했는데 ‘잘생긴’ 나를 위해 특별히 30분만 더 있어주겠다고 잔뜩 선심을 쓰는 척하면서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해보라고 했다. 한국인이고, 백일 된 아이가 이제 곧 엄마와 함께 싱가포르에 올 거고…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자기가 어떤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며 갑자기 내 핸드폰 배경화면에 있던 아이가 너무 귀엽다느니 감정에 극한 변화를 겪다가 바로 어딘가에 전화를 시작했다. 미스 리가 전화를 하는 동안 나는 잠시 내 일을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자기 핸드폰 화면을 내 얼굴에 들이대면서 이 친구 어떠냐고 인터뷰를 해보라는 것이었다. 다짜고짜도 이런 경우가 있나 싶었지만 얘기가 빠른 점이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인터뷰를 보는 동안 자신은 또 어딘가에 열심히 전화를 하더니 내 대화가 끝나자마자 다시 영상통화 중인 핸드폰 하나를 내게 건네주었다. 그렇게 두 번째로 만난 사람이 지금의 라니 이모였다.
전화를 마치고 관심을 보이는 내게 미스 리는 나의 의견을 묻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에는 라니를 선택하는 것이 좋겠다며 굳은 결심을 지은 표정을 보였다. 마치 물건을 평하는 듯한 모호한 칭찬이 귀에 거슬리기는 했지만 짧은 대화 동안 내가 받은 인상과도 대체로 일치하는 것이었다. 나는 라니의 선한 인상과 건강한 목소리가 좋았다, 한국에 있는 아내와 상의 후 곧 연락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라니의 연락처와 이력서를 하나 받아 나왔다. 기분이 좋아진 것 같지만 웃음기는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을 가진 미스 리는 저녁을 아직 안 먹었으면 여기 쇼핑몰에 있는 치킨라이스를 한번 먹어보라는 친절한(?) 조언까지 건넸다. 우리나라의 제육덮밥처럼 싱가포르에서 흔하디 흔한 게 치킨라이스지만 먹으면서 제법 맛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가 아내에게 결과를 보고했고, 한국 친정에서 홀로 아기를 돌보고 있는 나의 결정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며 내게 모든 걸 맡겼다. 라니 이모의 선한 인상을 아내도 무척 좋아했다. 그렇게 나는 다시 미스 리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에게 라니를 연결해 달라고 말했다. 라니 이모는 그렇게 우리 집에 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