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그림을 보며, 내 처음을 떠올리다
#1
아내가 철야를 간 시간, 아이들이 각자의 놀이에 집중한 틈을 타 빨래를 개고, 책을 본다.
둘째 화평이가 조용히 그림 몇 장을 가져온다.
"아빠 어때?"
조금 전 뽑아준 폴리 그림에 주황색 형광펜으로 군데군데 색칠을 했다.
아이가 아빠의 반응을 물어볼 때, 바라는 것은 평가가 아닌 칭찬이다. 더군다나 3살 아이의 경우는.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웃으며 핀잔을 주기보다는, 칭찬이 좀 더 맞는 듯하여 둘러서 물어보았다.
"(엉덩이를 두들겨주며) 이쁘네, 근데 왜 주황색으로 칠한 거야?"
"이게 이뻐서"
그리고 자리에 돌아가더니, 남아 있는 그림도 모두 주황색으로 칠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재미있어서인지, 정말 예뻐서인지, 칭찬이 좋아서인지는 모르겠다.
예전 일본 공익광고처럼, 고래를 그리는 것은 아닌 듯하다.
그렇게 한참, 오래 머문 자리에 구멍이 나도록, 색칠을 했다.
아이도 어른도 인정은 행동하게 하는 힘이 있다.
#2
3살 아이의 집중하는 모습을 보며, 아이의 머릿속을 궁금해하다가,
문뜩, 내 중학교 시절 첫 요리가 떠올랐다.
떡볶이.
PC에서 레시피를 찾아, 떡을 넣고, 라면을 넣고.
첫 요리치고는 제법 그럴싸한 색이 났다.
혼자 먼저 먹기 뭐 해서, 방에 계신 외할아버지께 한 접시 먼저 가져다드렸다.
"할아버지 제가 만들었는데 드세요. "
"고맙다. 잘 먹었다."
한 10여분이 지났을까? 할아버지는 깨끗이 비워진 빈 그릇을 내오셨다.
나도 맛을 볼까?
그제야 한 입 먹고, 나는 좋아하는 떡, 좋아하는 라면임에도, 통째로 쓰레기통에 넣어버렸다.
입을 헹궈야 할 정도로 너무 짰고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빈 그릇을 보고 눈물이 났다.
그 떡볶이를 시작으로, 2년 정도 어머니가 자리를 비우셨을 때 할아버지의 저녁을 챙겨드렸다.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그때도 남기시진 않았던 것 같다.
#3
지금의 나는 요리를 즐기는 편이고, 제법 잘하는 편이다.
상대적 기준이야 각자 다르고, 절대적 기준이야 응당 충족시키지 못할지라도,
적어도 내 가족들, 손님들이 오셨을 때는 집밥을 차려줄 정도는 된다.
촌철살인의 평가를 하는 아내는 주말에는 먹고 싶은 요리를 부탁하고,
아부와 거짓이 없는 아이들은 아빠의 요리를 먹고, 엄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어준다.
#1
<위대한 멈춤>이라는 책에서는 평범한 인물이 위인이 되는 결정적 순간, Turning Point가 아닌 Turning Period에 집중한다.
그때 모한다스 간디가 마하트마 간디가 되는 전환기의 순간을 '남아공의 차별'로 꼽는다. 평범에 못 미쳤던 변호사의 시선이 자기에서 타인으로 넘어간 데에는 분명 그 사건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의 근본이 된 '아힘사', '사티아그라하'의 바탕은 청소년 시절, 아버지의 눈물과 용서였다.
#2
부모가 자식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는 자신의 삶으로 인생의 옳은 방향을 보여 주는 것이다.
자식은 잔소리를 통해서는 좀처럼 배우지 않지만, 부모 모습을 보면서는 좋은 점도 나쁜 점도 무섭도록 배운다.
<배려의 말들>, 류승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