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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나벤투라 May 05. 2016

'눈을 감고, 회상에 잠기다'

조심조심 슬그머니, 부서지지 않게.

군복무 시절 여름 휴가, 함께 했던 여행. 무엇이 저리 즐거울까?  

  “영훈아!! 이 날씨는 도대체 언제쯤 따뜻해질까? 추워죽겠어.”

  “맞습니다. 추운 날씨에, 야간근무는 적응이 안 됩니다. 발이 깨질 것만 같습니다.”

  “조금만 참아. 광주는 이미 봄이라던데. 철원은 다른 나라 같아. 북한은 더 춥겠지?”

  “예, 그쪽은 겨울 냄새가 더 짙을 것 같습니다.”

  “응. 근무 끝나면 우리 따뜻한 딸기라떼 한잔 마시고 자자.”

  “예, 알겠습니다!”

  어둠을 잔잔히 비추던 별들은 어느덧 밝은 빛 속으로 모습을 감추고, 새들의 재잘대는 울음소리와 시끄러운 기상음악은 모포 안에 웅크려있던 우리들을 일으켜 세웠다. 후임들의 군기 잡힌 기상 체조, 서두른 세면 세족은 바쁜 하루의 시작을 알렸고 들려오는 집합 방송은 다시 우리의 몸을 긴장케 했다. 매일같이 이렇게 하루가 시작되고 지나갔다.

  아직은 추운 어느 날, 연병장으로 나서는 길. 나를 반기는 건 눈을 찌푸리게 하는 쨍한 아침햇살과 꽁꽁 얼어붙은 모랫바닥이라니! 녹을 생각도 없어 보이는 그 딱딱함이 반갑지 않아 나는 떼를 쓰듯 발을 동동 굴렀다. 매일 아침 도는 구보 코스엔 우리들의 발자국이 보였고, 그것은 어느새 하나의 길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평소처럼 구보를 하는데, 길가에 삐죽 보이는 초록빛. 드디어, 봄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우영훈!!! 이제 철원에도 봄이 오려나 봐!! 저기!! 저기에 초록색!!!”

  “저도 보입니다! 기념으로 딸기라떼 한 잔 하시겠습니까?”

  “네가 사. 한 잔, 아니 두 잔 사. 가자!”

  우리 둘은 어느새 싱글벙글 웃으며 자판기를 향해가고 있었다. 계절이 바뀌는 것을 이렇게나 기다렸던 적이 있었을까? 추운 날씨에 마음까지 웅크려져 있던 나는 간절히 바라고 있었나 보다. 이젠 그 길 틈틈이 올라온 초록의 생명들이 계속되길, 그리고 그것들은 어서 ‘봄’이란 계절로 다가오기를 말이다.

  생활관에 들어서니, 사람들은 침상에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역시 봄은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의 기뻤던 표정과는 다르게 다소 우울한 표정으로 봄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눈이 녹고 날씨가 따뜻해지기 시작하면, 쌓인 눈 때문에 하지 못 했던 힘든 작업을 다시 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뿔싸! 그 이야길 듣자, 웃음기가 싹 가셨다. 겨울잠을 자는 동물들이 있듯, 우리 포대의 병사들에게 추운 겨울은 휴식기임을 잊고 있었다. 다들 시무룩해있는데, 어느 때나 그랬듯 나에게 말년 병장의 장난스러운 말이 들려왔다.

  “야, 나는 내일모레 전역하는데! 너희들은 무거운 총 들고 찝찝한 위장크림 발라가며 열심히 훈련하겠구나? 부럽다, 부러워~ 나도 하고 싶은데……헤헤”

  “방해만 됩니다. 그냥 평소처럼 여기서 누워계십시오.”

  “너는 선임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냐?”

  “선임은 무슨, 내일모레 전역하면 그냥 형 아닙니까? 전역 빵이나 기대하십시오.”

  “그, 그렇지. 하하 PX나 가자. 놀려서 미안해. 라면 사 줄게!”

  “그럼, 두 개 사 주셔야 합니다. 전 비벼서 먹을 겁니다. 영훈아, 너도 사달라고 해.”

  “그럼 솔직히 전 냉동도. 하하.”

  추운 날씨에 익숙했던 주변의 환경은 조금씩 봄을 준비해 가고 있었다. 두꺼운 방한용품, 뜨겁게 달구어진 침상과 샤워기의 물도 이제 낯설어졌다. 하지만 한때 그렇게 고대했던 포근함이 막상 우리 앞에 찾아왔을 때, 봄은 더 이상 우리가 기다리는 이야기의 주인공도, 바램도 아니었다. 봄은 그저 그런, 매일 마주할 수밖에 없는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둘러싼 계절이란 것이었다. 그렇게 계절은 흐르고 나에게도 변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곳에서의 생활이, 머릿속에서 꺼내야 하는 차례가 되었다.

  “영훈아, 나 복학생이잖아! 이제 개강이야. 학교는 그대론데, 이상하게도 낯설어.”

  “응 형, 나는 이제 임관해서 다시 철원으로 가야 해.” 

  “나 전역하고 너 못 본지 벌써 5개월째야. 보고 싶다. 작년 이맘때, 너나 나나 딸기라떼만 마시고 있으면 서로 웃음기가 가득히 달려왔지. ‘한입만!’ 이러면서 한잔 더 뽑으라며 자판기 앞에 그렇게 서로를 붙잡고 있었는데 말이야.”

  “진짜 웃겨. 맞아. 우리 언제 또 그럴 수 있을까? 그립다, 정말.”

  “응. 그곳에서 보냈던 시간은 답답하고 힘들었지만 그래도 참 즐거웠어.”

  “함께여서 소중했던 그 시간들, 잊지 말자. 항상 기억하고 싶다.”

  “영훈아, 갑자기 생각났는데 우리 이야기 글로 남겨볼까?”

서로의 통화 너머로 오고 가는 추억은, 우리를 다시 미소 짓게 했고 그땐 단지 일상에 불과했던 생활을 우리가 얼마나 행복하게 지냈는지 생각하게 했다. 서로에게 이야기는 안 했지만 우리는 서로를 가족과 같이 소중히 여겼다. 떨어져 있어도 문득 생각나는,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가족 말이다. 그렇게 나의 삶 일부분이 함께 지내온 시간들로 채워졌던 순간, 그 추억의 소중함은 나에게 자연스레 다가왔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불안했다. 소중한 추억들이 어느새 우리에게 봄처럼 익숙해질까 봐. 그래서 그 소중함도 놓칠까 봐. 

  이제와 돌이켜보면 나는 종종 함께여서 행복할 수 있었던 시간들을 잊어왔다. 깊은 슬픔이나 외로움을 느끼고 나서야 소중한 추억들을 찾으려 했고, 그것은 내가 삶을 살아내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꼭’이라는 마음으로 그것들을 자꾸만 붙잡으려 애썼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행복했던 그 기억들은 나에게 같은 이야기를 속삭이며 멀어져만 갔다. ‘우리가 옅어져야 다가올 기억들이 더 소중하게 느껴질 거야’라며.

  “형! 우리 이야기 글로 남긴다면서, 어떻게 할 거야? 뭐가 필요할까?”

  “아니, 괜찮아. 지금은 주인공도 작가도 우리니까, 그냥 적어보자. 생각해봐. 우리 함께 보내왔던 시간들은, 웃음이 녹아 내린 살아있는 진짜 이야기였어. 그대로, 좋았던 거야. 우린 그곳에서 매일 웃는 법을, 자주 감사하는 법을, 그리고 짧게 슬퍼하고 서로 안아주는 법을 배워왔어. 그곳에서의 생활이 그랬듯, 지금의 일상도 마찬가지야. 돌아올 일상이 있기에 방랑이 아닌 생생한 이야기가 될 수 있었던 그곳에서의 우리 삶도, 지금은 잠시 추억으로 남겨두자. 시간이 지나 짙은 겨울 냄새가 코를 다시 자극할 때쯤 머릿속에 밀려드는 회상 속에서 그때처럼, 우리 각자 딸기라떼 한 잔 마시며 포근한 봄을 기대하는 거야. 그리고 매번 우리에게 봄이 찾아오는 한, 우리는 그 추억들을 소중함으로 여밀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그때의 추억들은 기억하려 하지 않아도, 곧 찾아올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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