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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묵묵부담 Apr 05. 2020

슬기로운 재택 생활

재택근무를 맞이하는 자세

사는 동안 경제위기를 체감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 경제위기가 바이러스에서부터 시작될 줄은 더 몰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경제위기로 몇 주간의 재택근무를 하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다. 4월 3일은 몇 번의 재택 연장 공지 끝에 재택근무 종료를 선고받은 날이었다. 그런데 4월 3일의 근무시간이 끝날 때쯤 한 달간의 재택근무연장 메일을 보게 되었다.


3월의 대부분은 개강하는 학생의 마음으로 4월 6일을 기다렸다. 토익학원도 다니고 공모전을 준비하면서도 캠퍼스에서 수업을 듣고 싶었던 겨울방학의 기다림으로. 이렇게 갑작스럽게 재택근무가 연장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친구들에게 재택근무가 한 달 밀렸다는 넋두리를 하자 대부분은 우리 회사의 근무환경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아니, 한 달 유급휴가를 주는 것이 아니라고. 물론 무급휴가, 순환휴직 등이 판치는 뉴스 기사를 보면 우리 회사는 위기 속에서도 매우 합리적인 근무환경을 가진 것이 맞지만, 재택근무는 휴가도 아니고, 온라인 강의를 들으면서 딴짓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사실 전 회사에서도 WFH (Work From Home)이 있었다. 연차를 차감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고 별도의 업무일지를 작성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시스템에서 WFH을 신청하고 매니저에게 재택근무를 한다고 이야기하면 바로 집에서 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디지털노마드가 숱한 IT 업계에서는 노트북과 핸드폰만 있으면 지구 어디에서도 업무가 가능했다. 하지만, 내가 다녔던 만 3년의 기간에 WFH을 쓴 사람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누가 눈치를 주는 것도 아니고 신청이 번거롭지도 않았는데 그랬다.  


재택근무가 길어지면서 지난 과거를 떠올려보니 확실히 깨달은 게 있다. 분명 재택근무는 불편한 것들이 있다. 그래서 굳이 WFH를 쓰지 않은 것이라고.


재택근무는 이럴 때 불편해진다.



재택근무가 불편해지는 순간들


1. 듀얼 모니터가 그리워


집에서 일을 하다 보면 몸이 아프다. 숫자가 빽빽하게 적혀있는 리포트와 정산서를 볼 때는 눈이 침침하고, 여러 가지 레퍼런스를 찾으면서 기획서를 쓰는 순간 공격적으로 alt+tab을 누를 때는 팔이 아파져 온다. 회사에서도 거북목은 어찌하지 못했는데 노트북 하나만 붙잡고 일을 하니 퇴근 시간만 다가오면 더욱 목이 뻐근했다. 회사의 장비는 업무환경에 꽤 많은 영향을 준다. 특히 듀얼 모니터의 부재는 뼈아프다. 업무효율은 반으로 줄어드는 데 몸은 두 배로 아프다니. 세상에 이런 비효율이 없다.


2. “먼저 이야기하세요"


재택근무에도 회의가 있다. 그리고 회의에서 제일 많이 이야기하는 말 중 하나가 “먼저 이야기하세요.” 다. 감정과 비언어적 피드백이 없는 언어생활은 생각보다 훨씬 끔찍했다. 나처럼 목소리에 톤이 거의 없는 사람은 가끔 “아, 불편한 건 아니에요” 식의 쿠션 멘트를 더해야 했다. 회의시간에 서로 말할 타이밍을 잡기 위해 보냈던 눈짓이 없어지는 순간? 대부분의 회의는 질의응답으로 변한다.


3. 사라진 커피 한잔의 여유


회사 출근 직후, 그리고 나른한 오후 2시. 직장인들의 피로 회복을 위해선 검은 물약이 필요하다. 카페인과 함께 틀어진 일을 씹어도 보고 신세 한탄도 하다 보면 에너지가 찬다. 재택근무에는 이런 여유도 없고 커피를 마신다고 에너지가 차지도 않는다. 커피와 수다는 사실 완벽한 한 쌍일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니까. 누가 CCTV를 달아놓은 것도 아닌데 재택근무 때는 뭔가 온종일 핸드폰을 잡고 메신저에 칼답을 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있다. 카페인도, 수다도, 여유도 없는 업무 생활이라니. 며칠만 지나면 바닥인 체력으로 키보드를 두드린다.


4. 일, 일, 일


인정한다. 재택근무의 가장 큰 장점. 불필요한 일이 줄어든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 시간이 필요한 일로만 가득 차는 것도 꽤 부담이다. 회사에서 눈칫밥으로 아는 것들이 있다. 아, 누가 회의를 갔구나, 누가 바쁘구나. 종일 자리에 돌아오지 못한 동료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질문은 미뤄둔다. 집에서 일을 하다 보면 눈치를 볼 수 없어서 이런저런 요청과 질문을 쏟아붓는다. 반대로 나도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을 한 번에 받는다. 더 중요한 여러 가지 일들이 있지만, 재택근무에서는 메신저 칼답이 더 중요해 보이는 순간이 있다. 집이라서 아무 일도 안 한다는 소리는 듣기 싫으니까.



아, 물론 집과 일터의 경계가 사라진다는 아주 큰 단점도 있다. 일한 자리에서 밥을 먹고 밥을 먹은 자리에서 휴식을 취한다. 이런 과정을 한 달 내내 지속하면 단절된 공간에서 사람이 어떻게 미쳐가는지 서서히 파악하게 된다.


앞으로 한 달이나 재택근무를 더 하다니. 지금처럼 재택근무를 하면 안 될 것 같다. 앞으로의 한 달은 조금 더 슬기롭게 재택 생활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슬기로운 재택 생활


1. 슬기로운 업무환경 만들기


재택 1주 차에는 몰랐다. 하지만 중요하다. 듀얼 모니터, 노트북 받침대, 오래 앉을 수 있는 의자. 재택을 오래 하다 보면 왜 식탁은 식탁이고, 책상은 책상인지 알게 된다. 앞으로의 한 달은 식탐 겸 책상과는 이별하고 업무는 책상에서 식사는 식탁에서 할 예정이다.


 2. 슬기로운 커뮤니케이션


메신저의 텍스트 프로필을 적극 활용할 것이다. 나는 회의 중이에요, 업무 집중시간이에요, 퇴근했어요, 휴가예요. 내가 지금 일하다 잠든 것이 아니고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그러면 시간이 지나 답변을 보내도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겠지.


3. 슬기로운 옷차림


확실해진 것이 있다. 무조건 씻은 뒤 조금은 불편한 옷을 입고 자리에 앉아야 한다는 것. 나는 나의 의지력을 믿지 않는다. 일어나자마자 잠옷 차림의 부은 얼굴로 자리에 앉아 일을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 갑자기 화상회의를 요청해도 당황하지 않는 옷차림으로 일해야지.


4. 슬기로운 휴식


휴식에 당당해질 것이다. 커피를 마시는 시간, 스트레칭을 하는 시간, 그리고 멍하니 머리를 비우는 시간. 왜 빡센 회의가 끝나면 꼭 커피를 마셨을까. 당당한 휴식 뒤에 빡세게 업무에 집중하는 것이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붙잡고 9시간 내내 일하는 것보다 낫다.



사실 어떻게 고민해도 회사생활보다 나은 업무환경과 자세를 만들어 낼 자신이 없다. 콩알만 한 우리 집에서는 몇 발자국만 떼면 침대가 나오고, 냉장고에는 먹고 싶은 음식과 맛있는 술이 한가득이고, 고개만 돌리면 휴식시간에 즐기던 책, 음악, 영화, 게임이 있으니까.


재택근무가 장기화되면서 어떻게 하면 집에서 슬기롭게 일할지 보다는 빨리 회사에 복귀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뿐이다. 정말로 회사에서 일하는 것보다 집에서 일하는 것이 더 효율이 높다고 생각한다면 진심으로 경의를 표한다. (진짜 진심이다)


어떻게 하면 슬기롭게 재택 생활을 할지 모르겠다. 나는 그저 퇴근 후 빡센 하루를 곱씹으며 월급의 신이 제공한 오마카세, 한정식, 참치 코스를 양껏 먹고 싶다. 친구들과 그리고 동료들과. 침 튀기고 수다나 떨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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