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그림과 이야기
엄마는 말이 많지 않은 사람이다. 무언가를 꾹꾹 눌러 담은 채, 늘 조용히 지나가셨다. 그래서일까.
엄마가 남긴 그림과 책을 마주했을 때 나는 처음으로 엄마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엄마가 쓰신 책(자서전)에는 기억에 남는 굵직한 에피소드들만 담겨 있었다. 나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장면들이었지만 그 안에서 처음 보는 엄마의 감정을 발견했다. 같은 시간을 살았지만 나는 보지 못했던 마음을 글을 통해 뒤늦게 읽게 되었다.
언젠가 그 장면들이 나를 안아줄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말 대신, 그림으로도 많은 걸 남기셨다.
복지관에 가서 그림을 배우신다고 했을 때,
‘엄마에게도 그런 취미가 있으셨나?’ 하고
조금은 의아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첫 그림을 꺼내든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한참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림 속에 깃든 색과 선,
그 조용한 아름다움이 너무도 엄마다웠기에.
그동안 단 한 번도 펼쳐지지 못했던 재능,
그게 이렇게 빛났다는 사실이
아깝고도, 미안해서
마음이 오래도록 먹먹했다.
해바라기밭 위 오두막.
숲과 들, 햇살과 바람이 있는 풍경.
삶 한가운데 평화를 놓아둔 듯한 그림이었다.
해바라기 그림을 완성한 날,
엄마는 조심스럽게 그 그림을 내게 건넸다.
“이거, 집에 걸어놔.”
그 한마디에, 나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해바라기잖아.”
그날의 대화는 짧았지만,
그 장면은 또 하나의 그림이 되어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남았다.
언젠가 엄마가 또 다른 그림을 그릴 때,
그 안에 담길지 모를 풍경.
해바라기와 햇살, 그리고 엄마와 나.
우리도 그렇게, 한 장면이 되어가고 있었다.
또 다른 그림.
분홍 꽃덩굴 아래 조용히 놓인 파란 문.
문을 열면, 지나온 계절이 조용히 흐를 것 같았다.
그리운 장면들로 가득한, 엄마만의 기억의 방.
엄마의 그림은
칠순 즈음,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쓴
작은 자서전 한 권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 책 속에는 직접 그린 그림도 함께 담겨 있었는데,
아마도 엄마는 글만으로는 다 전할 수 없던 마음들을
그림으로도 남기고 싶으셨던 게 아닐까.
오랜 세월 묵묵히 살아낸 사람만이 꺼낼 수 있는 이야기들.
무엇을 담을 것인가, 어떤 순간을 남길 것인가.
엄마는 그 고민 끝에
말 대신 색을, 문장 대신 선을 선택하셨다.
그림들은 그렇게 엄마 삶의 조각들을 따라 펼쳐지고 있었다.
엄마의 그림은
어느 날은 동화 같고,
어느 날은 고향 마을의 풍경처럼 따뜻했다.
장터와 논밭, 소풍길, 한복 입은 가족들…
그 모든 장면들은
엄마가 한 번쯤 마음에 품었을 기억들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그렇게
기억을 그리고 마음을 남기셨다.
이 그림들과 책을 바라보고 있으면
문득 다가올 어떤 날,
엄마가 몹시 그리울 그날,
이 조각들이 조용히 나를 안아줄 것만 같다.
말은 사라져도
이 따뜻한 장면들은 오래 남는다.
멀어질 수는 있어도,
끝내 우리를 이어 줄 것만 같은 믿음.
그것이 이 그림이 내게 주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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