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성, 아이러니, 연대] 단평
요즘 리처드 로티의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를 읽고 있다. 이제 '아이러니'파트를 거의 다 읽고 '연대' 파트로 넘어가려 하는 중이다. 이 책은 추 선생님이 인권사회학 세미나 수업 중에 추천해주신 책이다. 사실 그 전에는 리처드 로티라는 이름은 알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이라 불리는 계열에 속한 철학자인 줄은 몰랐고, 너무나도 미국적인 'y'로 끝나는 로티라는 이름에 괜스레 거부감이 들어 찾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롤스와 노직과 같은 이름, 그리고 자유주의라는 꼬리표가 주는 거부감이 로티에도 걸쳐있었다. 하지만 정말 진보적이면서도 이데올로그는 아닌ㅎㅎ무한신뢰 추샘의 추천이라는 이유로, 그리고 마침 2020년에 개정판이 나온 따끈따끈한 번역에 미국 루틀레지 출판사 스타일의 미니멀한 표지 디자인이라는 이유로 책을 사서 보게 되었다. 사실 그 수업을 듣게 된 것도 우발적이었다. 인권 수업을 교양 수업과 난이도로 따지면 그 맞은편에 있는 대학원 전공 수업 중에서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마지막 순간에 결심을 바꾼 것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매우 좋은 선택이었고 좋은 책들과 사유들도 알게 되었다.
이 책이 첫 번째 파트에서 강조하는 대로, 모든 '만남'은 우연적이다. 너무나도 사소한 이유들 때문에 만남은 이루어지거나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만남의 기회에 나 자신을 던질 것인가, 마주침을 만남으로 전환시킬 것인가의 문제는 나 자신에게 달려있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결실을 위해서는 결심도 필요한 것이다. 물론 그 결심도 우연성 혹은 우발성이 만들어낸 욕구와 망설임의 계산 불가능한 역학 속에서 이루어지겠지만 말이다. 망설임의 순간 우리의 결정은 이미 깊은 무의식 속에 한쪽에서 기울어져 있는 것인지, 혹은 주사위던지기처럼 그 날의 손 높이 1센티미터의 차이에 의해, 떨어지는 표면의 약간의 티끌에 의해 본질적으로 다른 경로로 미끄러질 수 있는 것인지는 나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로티를 따라 생은 본질적으로 우연적이라고쳐도, 그것이 역사의 흐름 속에 강하게 들러붙은 우연성일지, 유목적인 우연성일지의 차이는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이 사소한지 결정적인지는 마찬가지로 모르겠고, 별로 따질 가치도 없는 것 같지만 매체의 범람이 더 큰 진폭의 우연성을 경험하게 해주는 것 같다는 느낌은 든다.
최근에 머릿속을 맴도는 것은 춘향빵집, 파코 데 루시아 그리고 퀸스갬빗이다. 음성검색 기능이 있는 지니뮤직 덕분에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이 사람의 노래를 포착할 수 있었고, 구글의 알고리즘 덕분에 '봉화 프랑스 빵집'만으로 엄마가 얘기했던 빵집을 찾을 수 있었다. 퀸스갬빗은... 그냥 넷플 메인에 맴돌았다. 사실 기술이 발전했다고 해서 꼭 누구에게나 '다른 것'을 접할 경향성을 높여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소비지향적이고 스노비시하며 문화적인 것을 갈망하는 성향은 이렇고 저런 특수성 하에 발현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재미없는 이야기이고. 그냥 이런 것들 때문에 철학 그리고 삶에 대해 또 한 번 정리해보게 된다.
로티가 강조하는 것 중 하나는, 철학이 정치로 향하고 윤리로 향하는, 종합적이고 선험적이며 분석적인 기획을 통해 그것들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는 성공할 수 없으며 의미도 없고, 무엇보다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철학자들은 아직도 그 재미없는 것들을 하고 있다. 나는 메타인지적으로 그러한 작업들을 훑어보는 것이 재미있기 때문에, 단지 좀 더 암호로 가득할 뿐인 일기장을 훔쳐보는 것 같기 때문에 그런 철학 책들을 읽는 것이 즐겁지만, 남에게 승인받거나 반박받기 위해 논증을 하는 업으로서의 철학을 생각하면 가슴이 꽉 막힌다. 그래서 그러면 사유가 아닌 재미있는 삶을 위한 목표, 로티의 표현을 빌리면 '마지막 언어'는 뭐가 되어야 할까?
이런 것들을 위에서 언급한 구체적인 대상들을 통해 떠올리게 된다. 물론 이 목록화는 순전히 나의 주관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내가 재미있고 내가 설레는 것만이 의미가 있는 것이니까.
퀸스갬빗, 데 루시아, 탈므리에 빵집
뭔가 "숙련", "재능", "성실함"이 키워드가 될 것 같다.
나는 꾸준히 예술에서 내러티브, 환유의 기발함, 노동의 숙련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왔다. 뭔가 텐션이 있어야 한다. 텐션은 물질성에서 구현된다. 개념미술은 게으르다. 숙련이 함축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시간성 속에서 구현되는 것이며, '부합'되어야 한다. 그 부합은 이데아같은 것에 대한 부합이 아니고, 언어화된 명제에 대한 부합이 아니고, 설계도에 대한 부합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암묵지 정도가 될 것이다. 빵을 구워낼 때의 그 일관성, 습도와 환경의 변화와 침투에도 불구하고 지켜낼 그 일관성. 그 일관성은 빵이라는 결과물에 구현되는 것이지, 어떤 주체를 상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의도의 외부에서 부과되는 우발성에 저항한다. 오늘 만든 빵은 어제와 같게, 내일 만들 빵도 오늘과 같게. 시간 속에서 나아간다. "요즘 영 별로네"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한 그 노력과 숙련. 단 한 토막의 빵이 아닌 10년의 제빵이 마스터피스가 된다. 빵의 탁월함은 레시피에 있지 않고, 제빵사에 있지 않으며, 물질적인 빵 한 토막에 있지도 않다. 그러나 그것은 일련의 빵의 "한시적인 역사"로서 존재한다. 탈므리에의 제빵사가 가령 20년 간 빵을 굽는다면 그것이 "그 빵이 맛있었지"의 "그 빵"이 될 것이다. 요리에는 1회분과 1인분의 마스터피스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그것이 아마추어리즘과 다르다면, 하루 몇 십 개의 빵을 구우면서도 일관성을 유지해야 하며, 매일 새벽 특정한 시간에 나와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성실하고 정직하다.
데 루시아의 기타 연주는 비슷하지만 약간은 다른 이야기도 할 수 있다. 물론 그러한 부분이 탈므리에 빵집에 부재한 것은 아니다. 또한 어쨌든 데 루시아의 연주 또한 곡의 박자와 노트에 "부합"해야한다. 다만 제빵에 비해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부각되는 부분은 '시행착오'라는 요소이다. 누가 유튜브 댓글에 "역시 하루45시간 150년의 연습의 결과는 다르다"라고 우스갯소리를 달아놨다. 데 루시아의 연주는 어떻게 인정받는가? 연주됨으로서 인정받는다. 그것은 흘러가버린다. 그것은 시간 속에 있다. 그것은 매 순간 "그렇게 구현되지 않을" 위험성을 두고 관객앞에 선다. 물론 피나는 노력 끝에 단단하게 자리잡은 자신감은 적어도 본인의 심리에는 그러한 우려를 위한 자리를 남겨두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것은 어떻게 우월하거나 탁월한가? 자꾸 개념미술을 욕해서 미안하지만, 또 다시 언급할 수밖에 없다. 개념미술은 실패의 위험성을 감수하지 않는다. 그것은 '정교하게' 구현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미세하게 어긋날" 여지가 없기 때문에 수치와 민망함에 대한 감수가 없다. 따라서 그것은 연습이 필요가 없다. 굳이 가능한 실패라면 "무관심"이라는 실패일 것이다.
퀸즈갬빗은? 어떤 이야기를 더할 수 있는가? 체스게임은 게임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비트겐슈타인이 가족유사성 개념을 창안하면서 '승패'가 반드시 '게임'의 필요조건은 아님을 지적하긴 했지만, 내 논의의 경우 승패를 하나의 요소로 들먹이고 싶다. 체스 게임은 승패가 갈린다. 체스를 통해 탁월성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예술적 플레이"라는 타이틀에 조금이라도 근접하기 위해서는 "이겨야" 한다. 그것은 경쟁이다. 디스이즈 콤피티션. 그러나 그것은 경쟁이면서도 옳음을 위한 경쟁이 아니다. 탁월함을 위한 경쟁이다. 개념미술은 경쟁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텐션이 없다. 다원성을 운운할 수도 있겠지만, 체스게임에서 승패의 요소는 다원성을 증진하는 요소일지는 몰라도 결코 억압하는 요소는 아니다. 이것은 건축이 실용과 아름다움의 텐션에서 어떠한 숭고함과 기발함을 만들어내는, 혹은 할리우드 생산시스템에서 마찬가지의 유형의 것을 만들어내는 것에 비견할 수 있다. 체스에는 규칙이 있다. 그 규칙을 습득한 후에만이 '자유'가 주어진다. 여기에 대해 더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개념미술을 많이 들먹였지만, 결국 그것은 하나의 이미지이자 대표물이며, 내가 반대하는 것은 몸에 대해 게으른 철학, 행동에 대한 숙련을 경시하는 철학이다. 적재적소에 손가락을 위치시키는 것, 습도에 맞춰 온도와 시간을 조절하는 것, 규칙과 기보를 외워 가변적인 상황에 적용하는 것은 모두 숙련의 과정을 요한다. 시간 속에서 펼쳐지는 우발적으로 다르게 펼쳐진 환경에 모종의 동일성을 구현하는 것이(혹은 그것 또한) 예술인 것이다.
사실 대단히 보수적인, 르네상스적인 예술관일 수도 있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매 순간의 우발성에 기댄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나 우발성의 미학에 의해 삶의 미학이 절하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엘리트주의적이고 학술적인 천재관은 규칙, 경쟁, 제한, 루틴, 숙련을 무시한다. 그것은 지루하며 이미 지나온 단계라고. 천재성에 의해 초월된 것이라고. 그러나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매혹적인 숙련에 도달했는가? "비평가관점적 미학"에서 벗어나, (창조자라는 명칭보다도) 수행자(연주자) 중심의 미학을 말한다면, 숙련은 너무나도 도달하기 어려운 것이며, 사실상 그 한계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테니스를 100% 잘할 수 있을까? 그것이 퍼센티지로 이야기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숙련의 미학은 비-창조적인 것도, 답습적인 것도, 완성 혹은 초월된 것도 아닐 것이다.
미학의 '발전'을 기술하고자 하는 자들은 변화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정작 실제로 수행하는 것은 "전통의 격하"이다. 그러나 "치즈 만들기"나 "농사짓기"가 "극복"되거나 치즈만들기가 아닌 것으로 발전될 수 없듯, 숙련의 미학은 창조성의 미학(이라고 제멋대로 지칭되는) 것에 의해 "나아질 수" 없다. 여기서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인상주의나 모더니즘과 같은 일련의 사조라기보다는 그것들을 하나의 선형적 "역사"로 구성하여 기술하려는 "미학의 역사학"일 것이다. 물론 그것이 모더니즘 자체와 구별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말하고 싶은 것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모더니스트의 "발전"에 취소선을 긋고 "변화"를 이야기하고 싶겠지만, 사실은 "변화" 또한 하나의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도대체 누구의 예술이 변화했다는 것인가? 누구의 관심사가 바뀌었다는 것인가? 고다르와 라스폰트리에는 자신의 주제의식과 기조를 바꾸어갈 것이고, 플라톤이나 데리다는 전기-중기-후기 사상을 이행해갔겠지만, 이름 없는 수많은 생활인들은? 500년동안의 맥주생산은? 습관과 반복과 연습과 습작의 권위를 살리고 싶다. 규칙과 승패가 즐겁고 쓰릴있으며 예측불가한 어떤 현상을 만들어낸다고 말하고 싶다.
그렇다면 제목은 왜 "빵은 빵일 뿐이다"인가? 다시 철학자라는 존재들로 돌아와보자. 앞서 생활인과 게임플레이어, 선수들의 경쟁은 옳음을 위한 경쟁이 아닌 탁월함을 위한 경쟁이라고 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는 자기효용감을 위한 것이다. 그러한 욕구가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생활인과 선수들은 경쟁하지만, 그것이 만들어내는 점수, 효과, 박수, 짜릿함을 위해 그렇게 한다. 그것은 여전히 "옳음"으로 환원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분야와 통약불가능하다. 점수는 게임 내적이다. 게임 밖에서는 의미를 잃는다. 고로 그것은 절대로 초월적일 수 없고, 선험적일 수도 없다. 빵은 그것을 먹고자하는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다. 테니스 선수의 커리어는 테니스에 관심을 갖는사람에게만 의미있다. 빵장수는 자신의 빵을 떡과 비교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자신의 빵이 제일 옳다거나 제일 맛있다고도 주장하지 않는다. 빵은 빵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철학자들은 어떤가? 그들은 "실질적인 경쟁"을 하지도 않으면서 정작 위의 생활인과 선수들이 하지 않는 그 많은 보기 흉한 짓을 하곤 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굳이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철학자들이 이들 생활인 혹은 선수들과 갖는 유일한 공통점이라면 그들의 사이비 경쟁은 "자기효용감"에의 욕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는 것이다. 빵장수나 테니스선수는 그 게임과 커리어 내재적인 가치를 긍정하는데 스스럼 없다. 빵장수는 빵을 위해 산다. 그러나 철학자는 자기가 옳음을 위해 산다고 주장한다. 얼마나 보기 흉한가? 아무튼 그런 이유로 의식의 흐름따라 글을 써봤다. 참고로 리처드 로티는 철학자가 아니다. 대학에서는 그렇게 분류를 할테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