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저씨 vol.1
집에서 나와 회사에 도착하기까지 30분 정도가 걸린다. 유난히 피곤한 날이면, 그 30분 동안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스스로를 상상한다.
“이번 촬영지는 남태평양 이누타섬이야. 공항에서 카누타고 들어가야 한다니까 카메라 팀하고 얘기해서 장비 최소화해야 돼. 그리고 작가 팀이랑 미팅 좀 잡자. 촬영 얼마 안 남았으니까, 다들 서둘러줘. 자자, 파이팅!”
회의를 마치자 스태프들은 일사분란하게 흩어진다. 회의실에 혼자 남아 이누타섬에 관한 최신 자료를 읽고, 영상들을 찾아본다. 현대 문명이 침범하지 못해, 여전히 고유한 문화를 유지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할 예정이다. 새로운 촬영에는 늘 새로운 설렘이 따른다. 촬영지가 낯설수록, 출연자의 삶이 이질적일수록 설렘도 커진다. 이누타섬과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이번엔 어떤 장면들을 담아낼지 머릿속에 그려본다.
띵~
회사 건물의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는 순간, 상상은 끝이 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이름이 붙은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켜자, 한글 파일 수십 개가 일사분란하게 정렬돼 있다. 1분기 실적 보고서, 2분기 사업 계획서, 보도 자료, 예산 설명서, 아침 회의 자료, 오후 회의 자료... 저마다 제목은 다르지만, 막상 열어보면 내용은 별반 다르지 않은 따분한 파일들이다.
지금 다니는 회사는 9시에 출근하면 퇴근하는 6시까지 점심시간을 제외하곤 밖으로 나갈 일이 거의 없는 곳이다. 일하는 시간 대부분을 한 자리에서 보내는 탓에, 남태평양의 이누타섬은커녕, 출력물을 찾으러 가는 공용 프린터까지 2미터, 보고하러 가는 팀장님 자리까지 5미터 남짓이 일하면서 움직이는 동선의 전부다.
“아빠처럼 살지 마라.” 술에 취한 아버지는 한 번씩 그렇게 말했다. 가끔 지쳐 보인 적은 있어도 크게 불행해 보이진 않았는데, 그런 말을 하곤 했다. 돌이켜보면, 아버지의 삶은 그야말로 평범한 회사원의 삶이었다. 한 직장에서, 딱 먹고 살 만큼 주는 월급을 받으면서, 너무 어렵지도 너무 쉽지도 않은 일을, 매일 반복되는 출퇴근과 함께, 수십 년을 했다. 안전하긴 해도 딱히 재미는 없는 삶, 아버지는 그런 삶을 물려주고 싶진 않았던 것 같다.
아버지가 종종 뱉은 말 때문이었는지, 평범한 회사원이 되고 싶진 않았다. 조금 더 재밌는 일을 하면서 살고 싶었다. 더 많은 세상을 다니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방송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일이 적절해 보였다. 평생 한 번 가볼 수 있을까 싶은 곳들, 평생 한 번 겪을까 말까한 일들, 살면서 한 번쯤 만나보고 싶었던 사람들, 당시엔 그 모든 것들이 TV 속에 있었다. 그래서 방송국에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원하는 일을 하면서 산다는 건 그리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었다. 몇 번의 선택과 몇 번의 운, 몇 번의 게으름으로 꿈은 나를 비켜갔고, 이젠 아버지와 다름없는, 지극히 평범한 사무직 회사원이 됐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평범한 회사원이 되는 것도 쉽지만은 않았다.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하고 보낸 시간이 꽤 길었다. 서른이 넘어서야 차지한 평범한 회사원의 자리는 그간의 꿈만큼이나 소중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소중하지만 지긋지긋한 이 자리에서 다행히 살아가고 있다.
같은 꿈을 꿨고, 성취해낸 친구들을 가끔 만난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다보면, 바라던 일에 바라던 모습만 있는 건 아니구나 느낄 때가 있다. 그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고 해도 잘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 든다. 어쩌면 사람은 결국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가게 돼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루지 못한 꿈에 미련은 여전하지만, 지금 평범한 회사원의 삶도 나쁘지만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