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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자몽 May 12. 2022

아내와 결혼하기로 결심한 순간

슬기로운 신혼생활 vol.14

“너는 언제 와이프랑 결혼하기로 결심했냐?” 미혼 상태의 과년한 지인들이 종종 이렇게 물어온다. 결혼 소식을 전할 때부터 결혼한 지 만 2년이 지난 지금까지 숱하게 들어온 예상 질문이라 모범 답안도 대강 정해져 있다. 질문자의 의도에 맞춰 머릿속에 떠오른 몇 가지 무난한 대답 중 하나를 골라 입밖으로 내뱉기만 하면 된다.


얼굴에 장난끼를 잔뜩 머금은 친구의 질문이라면 “보자마자 첫눈에 반했지, 뭐 있냐?”하는 답변과 함께 허세 섞인 표정을 지어 마음껏 놀릴 수 있도록 해준다. 반대로 최근에 연애에 실패한 지인의 절반쯤 한숨 섞인 우중충한 질문이라면 “뭐 그냥 지금 잘 만나고 있으니까 하는 거지.”라는 무미건조한 답에 살짝 찌푸린 미간을 더해준다.


사실 이제껏 진지하게 답을 얻고 싶어서 “너는 언제 와이프랑 결혼하기로 결심했냐?” 같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다들 결혼을 축하하기 위한 의례적인 말로, 결혼한 지인을 오랜만에 맞이하는 반가운 인사치레로 결혼을 결심한 순간을 물었고, 나도 그들의 기대에 부응해 적당한 모범 답안을 내놓은 것이다.


하지만 나이가 어느덧 삼십대 중반에 이르니 같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착각일지 모르겠으나 다소 진지한 표정으로 질문하기 시작했고 나도 으레 떠오르는 모범 답안만 내놓기는 부담스러워졌다. 질문자의 진지함에 걸맞게 마음에서 우러난 대답을 준비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들었다.


그래서 생각해보게 됐다. ‘왜 나는 아내와 결혼하기로 결심했나’, ‘단순히 좋아하는 마음이라면 연애로도 충분했을 텐데 왜 결국 결혼까지 이르렀나’ 같은 질문들을 한동안 스스로에게 던졌다. 그리고 연애 초기의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흠, 심오한 질문이야...



한창 연애하던 시절, 크리스마스였다. 우리는 제주도를 여행하고 있었다. 양손에는 전날 밤 아내가 첫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손등 부분에 파란색 털이 올라간 고급진 가죽 장갑이었다.


제주도의 겨울은 추웠지만 추운 것쯤은 사소한 문제였다. 성산 일출봉을 둘러보고, 성산읍 주변을 한참 산책하다 애월까지 가보기로 했다. 둘 다 운전할 줄도 모르던 시절이라 제주 시내버스를 탔다.


성산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애월까지 가려면 제주시 버스터미널에서 환승을 해야했다. 한겨울 날씨와 시내버스 배차시간까지 감안하면 고단한 여정이었지만 체력이 짱짱한 이십대라선지 한창 연애에 취해 있을 때라선지 당시엔 그냥 좋았다.


많이 추운지 걷기 힘들진 않은지 몇 걸음마다 서로 건넨 걱정어린 말들이나 낯선 지역의 시내버스에서 이따금 들려오는 사투리를 따라하면서 함께 킥킥대는 일, 창밖의 생경한 풍경을 아는 척 소개하면 놀란 척 받아주는 배려 섞인 반응들이 상당한 충족감을 주었다.


칼바람마저 따스했다...



그렇게 좋기만 하던 여정이었으나 목적지인 애월에 도착하자마자 위기가 찾아왔다. 버스에서 내려 장갑을 끼우려고 보니 뒷주머니에 넣어둔 장갑이 없었다. 가방이며 다른 주머니들을 몽땅 뒤져도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아내에게 바로 어제 받은 첫 크리스마스 선물을 포장을 푼 지 만 하루도 못 돼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속상하고 미안한 마음은 둘째치고 바로 옆 아내의 심기가 우려스러웠다. 기회만 있다면 당장 똑같은 장갑을 사와서 '짜잔, 사실 여기 있었지!'라며 시치미 떼고 싶은 심정이었다. 잠깐 두 눈을 감고 고갤 떨군 채로 아내의 짜증과 분노를 겸허히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했다.


각오를 다지고 눈을 떴을 때 아내가 건넨 첫마디는 "괜찮아?"였다. 아내는 짜증을 내긴 커녕 오히려 달래주었다. 한 번 찾아보자고, 못 찾으면 다시 사면 된다고 대인배처럼 말하더니 금세 제주 시내버스 회사 연락처를 알아냈다. 그러곤 우리가 타고 온 두 대의 버스, 성산에서 제주 터미널까지 타고 왔던 버스와 제주 터미널에서 출발해 방금 애월에 우리를 내려준 버스를 수배하기 시작했다.


이제와 말이지만 제주의 시내버스에서 잃어버린 장갑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어디서 잃어버렸는지도 정확히 몰랐고 이전에 대중교통에서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본 적이 있던가하면 거의 전무했다. 익숙하지 않는 동네에선 아무렴, 더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장갑을 찾았다. 정확히 말하면 아내가 찾아냈다. 아내는 버스 회사 직원에게 버스 번호와 버스에 탄 시간, 장소를 알렸고 버스 회사 직원은 아내가 알려준 버스 번호와 배차 시간을 조회해 두 명의 기사님을 연결해주었다. 그 중 제주 터미널에서 애월로 이어지는 노선을 운행한 기사님이 버스 좌석에 떨어져 있는 장갑을 발견했다. 친절하게도 기사님은 다음 운행 때 장갑을 애월로 가져다주었다. 아내의 첫 크리스마스 선물은 그렇게 반나절 만에 내 손에 다시 돌아왔다.


장갑을 찾고나니 완벽한 날이었다. 돌아온 장갑은 어딘지 모르게 새로웠다. 똑같은 모양에, 몇 시간 전 잃어버린 그 장갑이 틀림없는데 어딘지 모르게 잃어버리기 전의 것과 달랐다. 한층 애착이 생겼다고 할까. 손등에 그려진 무늬가, 가죽에 잡힌 주름 모양들이 전보다 훨씬 세밀하게 눈에 들어왔다.


지금은 아내가 된 당시 여자친구도 마찬가지로 달라보였다. 잠깐 사이 아내가 달라졌을리는 없으니 내 눈이 달라진 걸 테다. 그전까지 단순히 예쁘고 매력적인,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었던 아내가 이제는 가끔 의지할 수 있는 사람, 닮고 싶은 사람, 같이 있으면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사람으로 보였다. 그리고 이 사람과 결혼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아마 처음한 것 같다.


전에 알던 내가 아냐

브랜뉴 싸~운드♪



물론 아내와 결혼을 결심한 이유가 이것만은 아니다. 그로부터 5년 넘에 연애를 하면서 다른 수많은 이유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다만 제주도에서 함께 첫 크리스마스를 보낸 그날의 일들이 훗날 아내와 결혼을 생각하고 결심할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됐던 것 같다.



Leather g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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