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요리의 시대 속의 나.
드디어 몇 개 담아두었던 글들을 처음 발행했네요. 떨리는 마음이지만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설레고 두근거립니다. '철학이 있는 요리사'라는 제목으로 첫 글을 올렸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럼 즐거운 요리의 시대 속에 나는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을까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글쓰기의 목적은 사람마다 참 다양하겠지만 전 제 자신을 더 찾고 싶었습니다. 무언가 요리에 대한 명확한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조리과학에 대한 명확한 논리와 이론에도 약합니다. 그렇다고 돈이 많아서 남들이 먹지 못하는 고급 레스토랑의 메뉴들을 모두 먹어본 것도 아니고, 지역 곳곳을 여행하며 우리나라 방방곡곡의 다양한 식재료를 만나지도 못했습니다. 요리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 참 어정쩡합니다. 처음 내가 왜 요리를 사랑하게 되었을까에 대해 생각하며 과거를 돌아보기는 했지만 앞으로 내가 어떤 마음과 생각으로 '요리, 음식'이라는 이 업에서 나의 강점과 매력을 어필하며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게 가장 고민이었습니다. 그래서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 전 제 자신을 가장 깊이 돌아보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방향성을 정리하고 싶었습니다.
넘쳐나는 요리의 시대 속에서 저는 이런 철학으로 일하고 싶습니다.
좋은 식재료가 주는 유익을 기억하며 일하고 싶습니다.
전 항상 새로운 도전을 좋아합니다.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 숨어있던 매력적인 노래, 남들이 모르는 나만 아는 특별한 전시. 나의 열정에 불을 붙여주는 책. 그래서 처음 보는 좋은 식재료를 좋아합니다. 좋은 식재료가 주는 유익은 그 재료의 참 맛을 경험해보지 못하면 절대 알 수 없습니다. 커피를 직접 갈아 그 신선한 향을 유지할 때 어떤 느낌인지, 통영의 생생한 굴과 해산물이 들어간 미역국의 맛이 어떤지, 선홍빛 송어의 참맛이 어떤지 그냥 그런 것들을 늘 궁금해하며 살고 싶습니다. 식재료 자체가 주는 그 건강함, 신선함의 맛의 가치를 알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이일을 할 자격이 있겠구나 라는 자부심도 느껴지니까요. 그래서 좋은 식재료가 주는 유익을 기억하며 일하고 싶습니다.
요리하는 사람들의 귀한 손과 땀을 기억하며 일하고 싶습니다.
주방에서 뜨거운 불과 기름, 칼과 매일매일 넘쳐나는 설거지. 청소, 음식물 잔해까지. 그것들을 매일매일 경험하는 귀한 손을 기억하며 일하고 싶습니다. 누군가에게는 허접하고 쓸모없어 보이는 일이 될 수 있겠지만 그걸 감당해내는 요리하는 사람들의 그 인내와 노고는 정말 고귀하니까요. 정작 그렇게 음식을 선물하고 주면서 자기의 배를 채우기에는 너무도 귀찮고 버거운 그 사람들의 헌신을 기억하며 일하고 싶습니다.
새로운 조리도구와 조리법에 눈뜨는 사람들의 열정을 본받아 일하고 싶습니다.
요리하는 사람들은 늘 나의 조리 스킬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새로운 레시피를 공부하고 조리법을 연구합니다. 식재료와 불, 물이 함께 어우러져 재료를 변형시키고 다른 것에 맛을 빼앗기지 않고 조화롭게 어우러지기 위해 셰프들은 많은 연구와 노력을 거듭합니다. 비록 깊이 있는 조리법과 레시피, 조리도구에 대해 잘 모르지만 제가 하는 기획과 보고서와 다른 많은 업무 가운데 능수능란한 셰프처럼 시간에 맞춰 적절한 재료를 선별해 손질하고 조리하며 그 맛의 핵심을 짚어낼 수 있는 모습으로 일하고 싶습니다. 변화하는 시대 속에 우리 식문화가 어떻게 변화하고 어떻게 달라지는지 항상 끊임없는 사랑과 관심을 가지며 일하고 싶습니다.
우리 음식을 기억하며 지키며 살고 싶습니다.
한창 한식 세계화 관련 업무를 한 적이 있지만 그런 것들 다 덮어두고, 그냥 우리 가족의 음식을 나에게 남기고 싶습니다. 내 가족이 먹던 그 소울 푸드를 내가 언제든 만들어 낼 수 있는 내 음식, 우리 음식을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남을 섬기는 셰프들의 정직한 마음으로 일하고 싶습니다.
정직한 마음으로 요리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요리에는 순수함이 있습니다. 그 맛에도 열정이 있고요. 내 스스로 하는 일에도 그런 순수함과 열정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메뉴를 맛볼 때 이것을 어떻게 내가 맛을 내고 구현할 수 있을까. 아무 생각 없이 카피하기보다는 그 재료의 특성과 조리방법을 깊이 연구해 내 것으로 만들어 내는 요리사처럼. 그 맛으로 성실하게 남을 섬기는 모습으로 일하고 싶습니다. 부끄럽지 않은 셰프처럼요.
마구 써 내려간 저의 직업관이네요. 이렇게 적어 내려가다 보니 저도 꽤 괜찮은 철학을 갖추고 있는 것 같아 뿌듯합니다. 마치 주방에 있는 보조셰프쯤 된 기분? 이렇게 요리사들을 존경할 수 있다는 것도 참 감사한 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