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읽어서 뭐 하나’ 싶을 때가 있다. 많은 콘텐츠를 흡수하지만 제대로 소화하지는 못하는 것 같은 사람을 볼 때, SNS에 책, 영화 이야기를 늘어놓거나 심지어 훌륭한 작품을 쓰기도 하지만 그 사람의 삶을 보면 그 많은 이야기들 다 어디로 간 걸까 싶을 만큼 글과 삶이 일치하지 않을 때 마음이 서늘해진다.
책의 유용함을 따지고 싶은 게 아니다. 책을 많이 읽었으니 훌륭한 사람이어야 한다거나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책을 읽는다고 말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다만 은유 작가의 말처럼 말과 글이 삶을 초과하게 될까 봐 두려울 뿐이다.
게걸스럽게 온갖 이야기들을 먹어 치우고는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채 토사물 같은 글들을 쏟아 내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다. 양질의 음식을 적당히 먹고 제대로 소화한 사람이 건강한 것처럼, 글이라는 양식을 먹었으면 잘 소화해서 내 삶의 에너지로 만들고, 그 에너지로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쉴 새 없이 콘텐츠를 소비하는 사람을 알고 있다. 나는 그를 보면서 ‘중독’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수많은 콘텐츠 대체 어디에 남아 있는 건지 궁금할 때가 많았다. 철학, 정치, 문학 이야기를 쉴 새 없이 하지만, 최소한의 예의나 책임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사람.
페미니즘 책을 읽고 젠더 이슈에 몽매한 유명인들을 질타하는 이가 연인과의 스킨십 문제를 여자 사람 친구와 상의했다가 헤어졌다고 말할 때, 정신이 아득해졌다. 앎과 삶의 거리 이토록 멀구나 싶어서. 전 여자 친구를 불법촬영해 범죄자가 된 정바비도 재판이 진행되는 중에 인스타그램에 N번방 관련 청원을 촉구하는 게시물을 올렸다지.
허영과 모순에 대해 생각한다. 나의 모순, 허영을 짐작해 보는 밤. 내 허영의 힘은 어느 정도일까. 최은영 작가의 <밝은 밤>속 구절이 떠오른다.
침묵 속에서 밥을 먹으며 그녀는 처음으로 체념이라는 걸 배웠다. 발이 타들어가는 것처럼 아팠지만 그걸 남편에게 말한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피가 배어든 버선발을 뻔히 보고서도 아프냐고 단 한 번도 묻지 않는 사람에게 무슨 기대를 할 수 있을까.
어쩌다 밥을 쏟았는지, 복구네 아이가 무슨 짓을 했길래 그랬는지 물어주기를 바란다는 건 욕심이었다. 장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별다른 말과 행동이 없었던 사람이니까.
남편은 나의 고통에 관심이 없어. 그녀는 생각했다. 일말의 관심조차 없어. 그런데 왜 그랬을까. 왜 내가 군인들에게 잡혀가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말했던 걸까. 그것이 그녀 평생의 의문이었다. 허영심의 힘이 얼마나 센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60p)
그는 세상 사람들이 덜 고통받고 더 잘사는 세상을 꿈꾼다는 말을 하면서도 할머니의 발이 얼마나 부어 있는지, 가끔씩 배가 뭉칠 때마다 할머니가 얼마나 큰 두려움을 느끼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노동자들의 권리를 말하면서 할머니가 벌어온 돈은 아무렇지 않게 앗아갔다. 그런 그를 볼 때면 할머니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분노가 서린 웃음이었다.(91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