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회사 메신저를 끄고 집에 돌아오는 순간이 가장 짜릿했다. 천근만근이던 발걸음이 순식간에 날아갈듯 가벼워졌다. 하지만 그 자유는 늘 허무하고 짧았다.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안정적으로 월급을 안겨주는 직장이 있음에 감사한 마음과 지긋지긋하다는 마음이 늘 공존했다. 많은 직장인들이 그렇듯, 나 역시 "과연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이 길이 전부인가."라는 막연한 불안을 품고 살았다.
최근 서메리 작가의 <이상하고 아름다운 나의 N잡 일지>를 읽었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이상하면서도 아름다운 N잡러(복수 직업을 보유하고 다양한 일을 병행하는 사람)의 생활과 경험이 솔직하고 담백한 문체로 녹아 있다. 작가는 프리랜서 번역가로 출발해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유튜버, 강연자로 다양한 직업을 동시에 가지고 살아간다. 책은 예상보다 더 따뜻하고 현실적이었다. 화려한 성공담보다는 망설임, 실패, 그리고 다시 시작하는 이야기들이 페이지마다 묻어났다.
서메리 작가는 회사 체질이 아니라며 회사를 박차고 나온다. 당시 목표는 오로지 출판번역가로 독립근무자가 되는 것. 학교와 사회에서 배운 대로 ‘한 우물을 파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이번에도 우직하게 이 한 가지에 올인한다. 하지만 회사 밖 세상은 예상보다 더 낭만적이지 않았고, 말이 좋아 번역가 지망생이지 한동안 저축을 까먹고 사는 백수 신세를 면치 못한다. N잡을 시작한 건 거창한 청사진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돼서, 그러니까 고양이가 쥐를 무는 심정의 발로였다.
나는 내 우물이 정확히 몇 개인지 모른다. 초반에는 숫자만 많고 이렇다 할 ‘대표주자’가 없는 직업 정체성을 두고 번뇌도 많이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집착을 내려놓았다. 지금의 내게 중요한 것은 직함이 아니라 그 일의 본질이다. - p.130
책을 읽으며 가장 놀라웠던 점은, N잡이 꼭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작가는 처음부터 무언가 대단한 것을 계획하고 시작한 게 아니었다.
사소한 관심과 소박한 재능의 퍼즐 모아본 다음 시간과 노력을 적게 들여 시작할 수 있는 분야를 찔러보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안 되면 될 때까지'의 마인드를 버리고 그만둬야 할 때에 대한 자신만의 명확한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맞는 플랫폼으로 퍼스널 브랜딩을 한다.
<이상하고 아름다운 나의 N잡 일지>는 그래서 더 의미 있다. 이 책은 단순히 “N잡을 해봐라”라고 부추기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과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으라고 말한다. 그렇게 기웃거리다 나도 모르는 적성과 소질, 능력이 얻어걸리는 것이다.
N잡은 결국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가장 치열하게 묻고 답하는 과정이다. 직장에서는 주어진 역할만 해내면 됐지만, 회사 밖에서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 나 스스로에게 계속 물어야 한다. 그 과정이 녹록치 않지만, 스스로를 더 깊이 이해하고 단단하게 만드는 길이다.
인연의 연결고리는 언제나 예상하지 못하는 곳에서 효력을 발휘하는 법이다. 함께 책을 만들었던 출판사 편집자는 다른 회사로 이직하며 내게 번역 일감을 물어다주었다. 오디오북을 담당하던 매니저는 영상 제작자로 변신한 뒤 제품 홍보모델로 나를 추천해주었다. 강연 일로 인연을 맺었던 작가가 다리를 놓아준 덕에 라디오 방송에 출연할 수 있었다.
우리는 여전히 한 우물만 파야 한다는 말에 익숙하다. 나 역시 그동안 '안정적인 직업'이라는 한 줄짜리 명찰에만 집착하며 살았던 건 아닐까 돌아보게 된다. 시대는 이미 변했고, 한 우물이 말라버릴 수도 있다는 걸 모두가 안다. 그렇다고 무작정 새로운 우물을 파라는 게 아니라, 작은 관정을 몇 개쯤 더 뚫어두라는, 어쩌면 현실적이고도 따뜻한 조언처럼 느껴졌다.
책을 덮고 나서 내 일상에도 작은 물결을 만들어보고 싶어졌다. 꼭 거창한 일이 아니어도 좋다. 짧은 글을 쓰고, 오래 미뤘던 그림을 그려보고, 작은 강의를 기획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것이 언젠가 내 이름을 걸고 할 수 있는 새로운 일이 될 수도 있으니까.
이상하고 아름답고, 조금은 불안한 나만의 N잡 일지. 언젠가 나도 그것을 한 장씩 써 내려가고 싶다. 이 책은 그 시작에 용기를 불어넣어 준 고마운 친구 같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