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을 저녁, 공기가 한결 차분해지고 나무들은 서서히 잎의 빛깔을 바꾸기 시작한다. 창가에 앉아 이 책을 펼치면, 노스캐롤라이나 아우터 뱅크스 늪지대의 고독이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 델리아 오언스의 소설 <가재가 노래하는 곳> 주인공 카야가 겪었던 외로움은 어쩐지 가을의 공기와 닮아 있다. 쓸쓸하지만 투명하고, 차갑지만 아름답다.
카야는 어린 시절 가족에게 버려진 뒤, 계절의 변화를 몸으로 배우며 늪 속에서 성장한다. 여름의 뜨거움이 지나가면 찾아오는 고요한 가을은 그녀에게 상실을 알려주고, 떨어지는 나뭇잎은 홀로 서기를 가르쳐 준다. 사람들은 그녀를 늪지대 소녀, 마시걸이라 부르며 배척했지만, 카야는 그 고립 속에서 더 깊은 생명의 질서를 깨닫는다.
다른 아이들이 책에서 배운 지식을 카야는 새의 깃털과 조개껍질, 밀려드는 조수의 흐름에서 배웠다. 문명사회와 단절된 채 자연을 벗 삼아 성장한 카야는 책이나 교육과는 거리가 멀지만, 놀라운 관찰력으로 늪지 생태계를 연구하고 기록해 나간다. 사람들과 함께가 아닌 자연 안에서 자기만의 언어와 감각을 키워나갔다.
사랑도 찾아왔지만, 그 또한 잔혹하게 그녀를 시험했다. 착하고 성실한 테이트는 카야에게 글을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쳐준다. 테이트의 따스한 가르침은 카야에게 세상의 문을 열어줬다. 반면 마을의 최고 인기남 체이스는 카야를 욕망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며 결혼을 미끼로 농락한다.
그러던 어느 날 체이스가 늪지대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다. 마을 사람들은 부모 없이 못 배우고 자란 카야를 의심한다. 재판 끝에 카야는 무죄를 선고받고 다시 늪으로 들어가 테이트와 함께 생태 연구자로 조용하게 산다.
오랜 시간이 흘러 카야가 세상을 떠난 뒤, 테이트는 유품을 정리하다 집안 은밀한 공간에서 카야의 일기장을 발견한다. 그곳에는 카야의 범행을 고백하는 시와 체이스의 목걸이가 있었다. 어이없는 반전에 뒤통수가 쨍해지는 것도 잠시, 이내 카야의 선택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살인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위험한 침입자를 제거한 방어 본능이었다.
소설은 그렇게 외딴 습지에서 시작된 한 소녀의 이야기이자, 인간과 자연이 어떻게 서로를 닮아가는지에 대한 우화 같은 기록이다. 델리아 오언스 작가는 야생동물학자로 아프리카의 대지와 함께 살아온 이력이 있다. 논픽션 보고서를 써오던 작가가 일흔이 가까운 나이에 써낸 첫 소설이다. 작가의 동물학적 시선 덕분에, 늪의 생태와 그 속 생명체들이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또 다른 주인공처럼 살아 숨 쉬는 듯 느껴졌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가 아니면 자연의 일부인가. 카야는 가족과 사회에 버림받고 고립된 삶을 살면서 자연과 교감하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성장했다. 그녀의 고독은 슬픔이면서 동시에 자유였고, 늪은 그녀를 가두는 동시에 품어주는 집이었다. 델리아 오언스 작가가 전하고자 한 자연의 냉정한 질서, 생존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실제로 작가의 어머니는 활동적인 성격이었다고 한다. 종종 어린 딸에게 숲속에 들어가 놀게끔 부추겼다. 그럴 때마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까지 멀리 가거라”라고 말했다. 노년이 된 작가는 어머니가 말한 그곳을 이제야 알 것 같다고 말한다. 당연히 가재는 목소리가 없다. 노래도 하지 않는다. 어머니가 그 말을 한 이유는 딸이 자연을 충분히 경험하고 마음의 소리를 듣기를 소망했기 때문이다. 야생으로 깊숙이 들어가 나와 자연,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순간을 맞이한다면 그때 비로소 가재가 노래하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도 오래도록 아우터 뱅크스 늪지대의 잔상이 남았다. 카야의 그렁그렁한 눈동자를 떠올리며 창밖을 바라보니 바람이 흩어진 나뭇잎이 바닥을 스친다. 그 소리는 마치 카야가 듣던 갈대밭의 속삭임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멀어진 채 살아가지만, 여전히 계절은 우리의 피부와 마음을 흔든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그 잊고 있던 사실을 속삭인다. 사람이 기댈 수 있는 것은 사람을 뛰어넘어 흐르는 자연의 시간이라는 것을.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진정한 고립이란 혼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계절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저기 가재들이 노래하는 곳에서는 이렇게 잔인무도해 보이는 행위 덕분에 실제로 어미가 평생 키울 수 있는 새끼의 수를 늘리고, 힘들 때 새끼를 버리는 유전자가 다음 세대로 전해져. 그렇게 계속 끝없이 이어지는 거야. 인간도 그래. 지금 우리한테 가혹해 보이는 일 덕분에 늪에 살던 태초의 인간이 생존할 수 있었던 거라고. - p.2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