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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 Mar 11. 2019

[주간에세이] 처음 느낌 그대로, 이소라

주간BD, 3월 2주

내게 진짜 슬픔이 무엇인지 가르쳐준 사람은 이소라였다. 이소라의 음악을 통해 내가 몰랐던 내 안의 슬픔과 우울을 발견하고 규정했다. 감정은 자명하지 않아 누군가로부터 배우지 않으면 그것을 오롯이 느낄 수 없었다. 사랑하는 상대의 마음을 확인하는 순간의 설렘과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의 기쁨이 곧 행복이라고 배우지 않았더라면 그것이 행복이고 사랑인 줄 알지 못했을 테다. 글로 배우고 눈으로만 보았던 상실과 허무, 슬픔의 느낌이 이런 것이라 누군가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그것이 슬픔인지 알지 못했을 테다. 무뚝뚝한 삼 형제로 자라 그런지 감정의 인식과 표현에 서툴렀던 나는 개별의 감정을 누군가로부터 배웠다. 가족과 친구, 애인 혹은 책과 영화, 음악으로부터.

90년대의 이소라


슬픔의 감정을 의식하며 분명히 느꼈던 건 이소라의 음악 덕분이었다. 스무 살 버스 뒷자리 머리를 기댄 채 지났던 옛 광화문 광장 풍경 속 이소라의 목소리는 이것이 아름다움이라고 말해주듯 아름다움에 아름다움을 부었다. 어떤 이유도 없는 순수한 행복감이라 그 끝엔 아련함이 있었다. 아련함은 아릿했고, 이내 비릿한 슬픔으로 바뀌었다. 무릎 위 든든한 책가방을 감싸 안은 노곤한 저녁의 충만함은 곧 슬픔이 되었고, 이 아이러니의 경험은 '비극과 희극은 동전의 양면'이란 아포리즘의 개인적 체험이 되었다. 버스 속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이소라였기에 그런 감정을 느꼈는지, 감정 뒤 들리는 목소리가 이소라이었기에 그렇게 느꼈는지 알지 못하지만 행복감 뒤의 쓸쓸함, 만족감 뒤의 불쾌함, 자부심 뒤의 초라함을 인지하기 시작한 건 그 이후부터였다.

이소라 정규 6집 앨범 2004년 <눈썹달>


그날 이후 그녀의 음악은 내게 깊은 슬픔을 알려주었다. 행복하고 싶다, 웃고 싶다는 감정의 욕망처럼 슬프고 싶다는 욕망이 일어날 때 이소라의 노래를 들으면 수도꼭지가 열리듯 슬픔이 쏟아졌다. 풋풋하고 어설픈 첫사랑의 이별과 성숙하고 온전했다 착각한 사랑의 헤어짐 뒤에도 이소라의 노래는 슬퍼해야 한다는 강박의 이별자를 도와 슬픔으로 인도했다. 그녀의 음악을 들으며 진짜 느꼈던 감정은 쓸쓸함 보다 슬픔과 비극의 나르시시즘. 그로 인한 카타르시스였다. 바람이 부는 것만으로 시린 향기 속에 지난 시간을 되돌리게 했고, 사랑은 비극이라고, 너는 내가 아니라고, 기억과 추억은 결국 다르게 적힌다고. 이소라는 나보다 먼저 내 마음을 이야기해 주었다.


노래도 더 잘하고, 가창력도 더 좋은 다른 가수들에서 느낄 수 없는 감정을 왜 이소라의 노래에서만 느끼게 되는지, 그녀에게서만 느껴지는 박제된 낭만과 고통의 정체는 무엇인지. 이에 대해 평론가 신형철은 이소라가 예술가로서 갖는 음악에 대한 진심과 스스로를 향한 고통 자체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고통은 어쩌면 이미 그녀 내면에 존재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런 면에서 예술가는 예술성을 타고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그녀의 노래에서 느껴지는 고통과 슬픔은 순수하다 믿는다. 어설픈 데뷔 후 점차 성장하고 성숙해 가는 여느 아티스트와 달리 이소라는 처음부터 이소라였다. 1993년 20대 초반 <낯선사람들>의 '낯선사람들', '무대 위에', '왜 늘...?'의 감성과 슬픔은 2019년 50대(소라 누나 실화냐..)에 BTS SUGA와 함께 부른 '신청곡'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이소라의 시작, 93년 <낯선사람들>. 지금 들어도 세련된 느낌이다.


이소라의 음악과 감성, 목소리는 내 스무 살 처음 느낌 그대로 똑같기만 하다. 바뀐 건 내 생각이고, 흐른 건 시간뿐이다. 소라 누나는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다.


내 나이 40대의 이소라는 어떤 느낌일까. 50대엔 또 어떨까. 정말 좋아하면 변하지 않길 바라듯, 나는 이소라의 노래와 목소리가 변하지 않길 바란다. 소라 누나 제발 내 곁에서 떠나가지 말아요. 난 행복해, 사랑한다 말해도 쓸쓸한 순수의 시절. 잊지 말기로 해. 처음 느낌 그대로 기억해줘.

이소라 정규 1집 앨범 95년 <이소라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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