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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 Mar 24. 2024

피아노 치는 류마티스 환자 입니다

나의 류마티스 시간은 지금도 흐른다

스물일곱. 류마티스 진단을 받았다.


류마티스는 자가면역질환의 일환으로 면역이 스스로를 나쁜 세포로 인식하여 공격하는 난치병이다. 류마티스가 주로 공격하는 곳은 활막이 존재하는 모든 관절로, 이로 인해 관절 내에 염증이 발생하고 지속되어 변형이 생긴다.


초기에 발견해서 완치한 경우도 있다는데, 나의 경우는 초기에 갔던 병원에서 만난 한인 GP가 '환자보다 내 손이 더 부은 것 같은데요?' 하며 증상을 유심히 관찰하지 않았고, 당시 병원을 왔다 갔다 할 여건도 되지 않아 쉽게 치료받지 못하며 어영부영 지나쳤다.


류마티스 진단을 받은 지 10여 년이 지난 내 손도 변형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새끼손가락이 끊어지고는 한동안 큰맘 먹고 산 피아노도 방치했다.


겨우 이곳에 자리를 잡고 살면서 가끔씩 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한국을 나온 지 딱 10년째 되던 해에 장만한 새 피아노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지탱하는 근육이 류마티스의 공격으로 느슨해지면서 아예 눌러앉았다. 새끼손가락이 말려 들어간 것이다.


취미로 뚱땅거리던 것 뿐이었지만 피아노 앞에 앉을 때마다 마주하는 신체적 한계나 통증 같은 것들 앞에서 당황하곤 했다.


이제 영영 악기와는 연이 없을 거라고 혼자 마음을 정리했다. 어차피 어렸을 때 그만두었고, 대학 졸업 타지에서 쉐어하우스를 전전하는 동안 '피아노'는 꿈의 단어가 되었으니까.


꿈을 드디어 집에 들였는데. 반질반질 빛이 나던 피아노에 하얀 먼지가 소복해 닦는 날이면 생각이 많아졌다.


내가 마음을 나쁘게 먹은 날들이 많아 손가락을 앗아가셨나.


대가를 치르는 일이라고 여기며 나의 지난날을 돌아본다. 그럴 수 있지. 이런 병이 내게도 올 수 있지. 낙담과 체념을 반복하며 다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음악을 듣는데 와르르 무너졌다. 비슷한 경험을 자꾸 했다. 음악을 들을 때 마다 마음이 쉽게 무너졌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깊은 좌절감이 나를 붙잡고 끌어내렸다.


어느 정도 진행된 손의 변형으로 피아노 위의 손가락 각도가 다르고, 양손 손목도 살짝 돌아가 있어 칠 때마다 삐걱거린다. 오른손 새끼손가락 역시 들 수가 없으니 부자연스럽다.


손가락 근육이 다 빠진 것도 있지만, 손의 위치가 다르고 손목이 돌아가 있으니 소리는 매끄럽지 못하고, 손가락도 유연하지 못하다. 원래는 손이 커서 옥타브도 쉽게 잡고는 했는데 이제는 휘어진 오른손으로 옥타브는 잡는 일이 힘들고 통증을 동반할 때도 있다.


며칠을 마음속으로 빙글빙글. 내 마음을 나도 알 수 없는 채로 몇 번의 계절을 보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깨달았다. 나의 류마티스 시간은 지금도 흘러가고 있다다는 것을.


공교롭게도 이 병은 내 몸속에서 계속해서 진행될 것이고, 언젠가는 정말 아무것도 칠 수 없는 손이 될지도 모른다. 지금이 내가 갖을 수 있는 가장 최선손가락인 셈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곡들을 연습해 볼 수 있는 것도 큰 축복이겠구나.


즐길 수 있을 만큼, 지금 할 수 있는 것들로 소소하게나마 누릴 수 있다면, 어쩌면 그건 미래의 나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시 시작해보기로 했다. 나의 작고 작은 피아노 연습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음악의 순간을 기록한다는 일에 의미를 두며 퇴근 후 조금씩 연습하기로 한다.


앞으로의 삶 중 지금 가장 예쁠 나의 손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즐거운 연주를, 천천히 오래오래 할 수 있기를 바라며 나의 류마티스 이야기를 담아본다.




피아노 연습하는 영상을 인스타그램에 드문드문 올립니다 @piano.autumn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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