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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부시게

엄마의가출일기


스트라호프 수도원에서 저무는 해를 바라보며 ‘All of Me’를 듣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드라마 ‘눈이 부시게’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났다. 


요양병원에 있는 엄마를 찾아온 아들은,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엄마에게 묻는다. 언제가 제일 행복했냐고. 그때 혜자는 생각에 잠긴다. 대단한 날은 아니었지만, 그냥 그런 날이 행복했다. 혜자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과 함께 할 때였다. 눈이 부시게 마지막 장면에서, 김혜자이자 극 중 혜자의 나레이션은 나에게 긴 여운을 남겼다.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 그리고 주황빛 노을이 지는 그곳에서 준하가 말한다. “이제 나랑 같이 여기 있자. 어디가지 말고.” 준하의 품에 안 기며 혜자의 나레이션은 시작된다. 



눈이 부시게 아름답다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질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이였고, 딸이였고,
그리고 ‘나’였을 그대들에게... 


-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 중에서 - 




성인이 된 후 나는 조금 행복해지려 하면 불행했고, 불행해서 못버티겠다 싶을 즈음엔 다시 행복했다. 힘들어 죽겠다 싶다가도 그 순간을 극복하며 위기의 끝을 볼 때면, ‘그래, 하늘은 내게 감당할 수 있는 고통만 주나보다.’며 스스로를 위로하곤 했다. 처음에는 목구멍에 불이나는 듯한 설움과 절망을 느꼈지만, 시간이 갈 수록 조금씩 무뎌졌고 스스로 이겨내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처음이 어렵고 하면 할 수록 쉬워진다는 말은 정말 맞는 말이었다.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 ‘더 이상 살 수 없어서, 살기 위해 떠 났다’며 이해해달라는 말을 남긴채 엄마로부터의 전화는 끊겼다. 전화 너머 그녀의 흐느끼는 소리는 처음이었고, 낯설었고 무서웠다. 하지만 다시 전화 할 용기가 없었다. 하숙집 좁은 방 안에 홀로 앉아 있는데 마치 철장에 갇힌 기분이었다. 답답하고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리해보려 효창공원으로 향했다. 가장 초록초록하고 싱그러운 나무 아래, 가장 우울하고 슬픈 얼굴로 축 쳐진 내가 앉아 있었다. 


하염없이 울었다.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전후 상황을 모두 알 수는 없었지만, 이제 내 인생은 끝이 난 것만 같았다. 아슬아슬해 보였던 우리 가족이, 정말 무너져 버린것 같아 죽을 것 같았다. 더 이상 학교도 다닐 수 없을 것 같았고 연애도 결혼도 못하는 희망 없는 인간이 되어 버린 것 같아 서러웠다.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그 자리에서 몇 시간을 보냈는지 모른 다. 미친듯이 울고나니까 웃음이 나왔고 미친사람 같았다. ‘나 이제 어떡하지’를 몇번이고 중얼거렸다. 그러곤 하늘에 대고 분풀이를 했던 것 같다.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하냐고. 


집으로 투벅투벅 걸어와 제일 먼저 한 일은 아르바이트 검색이 었다. 시급이 제일 높은 것으로 고르고 또 골랐다. 지금 생각 해보면 정신력 하나는 최고였던 것 같다. 좌절하고만 있을 수 는 없었기에, 휴학기간을 늘리지 않으려면 최대한 빨리 등록금을 모으는 것이 우선순위였으니 움직여야 했다. 그렇게 하루 하루를 살아갔다. 하루를 더 하고, 또 하루를 더 하다보니 아픈 상처는 조금씩 아물어갔고 조금 더 단단해진 내가 있었다. 지나고 보니 그때 나의 처절한 슬픔은, 별 것 아닐지도 모르는 이겨낼 수 있는 슬픔이었다. 


그런데 그때 나는 그걸 몰랐다. 내가 제일 힘들었고, 상처가 아물어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살아내기에 바빠 20대 가장 예뻤던 그 시절의 청춘을 남기지 못했다. 내게 남은 것은 강인한 생활력과 굳은 의지였다. 내 인생 최고의 자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 조금은 마음을 가볍게 먹고 흔한 20대 여대생처럼도 살아봤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한다. 하긴 그때 그 순간을 즐기기에는 현실이 너무 가혹했지. 


눈이 부시게 속 혜자의 마지막 대사는, 나를 위로하는 말이었다. 그때 아팠던 너는 잊고,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 고민하느라 불행해하지 말고 그저 오늘을 눈이부시게 살라고 다독여줬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말아야지. 오늘을 살아가야지. 

눈이 부시게... 






아물지 않으면 흉터가 아니다. 아물었기 때문에 흉터다. 

이제는 흉터가 남아있다고 울지말고 흉터가 아물었다고 봄길을 걸어라 


- 정호승,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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