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가출일기
길을 잃었다. 바츨라프 동상에서 야간 도보투어를 끝내고 호기롭게 걷다가 방향감각을 상실해버렸다. 휴대폰 배터리는 2% 밖에 남지 않았고 와이파이 수신기는 이미 꺼진지 오래다. 급하게 가방에서 보조배터리를 뒤적거려 보는데, 이럴 때는 꼭 남아있지 않더라. 이제 고작 프라하에 온지 이틀인데 뭘 믿고 감대로 움직인 것일까 곱씹고 곱씹으며 후회를 반복한다. 분명 낮에 걸어온 길인것 같은데 이쪽으로 가면 숙소가 나오겠지 하며, 갈림길 앞에서 다른 선택을 하고야 말았다. 이 집이 그 집이고 그 집이 이 집인 수많은 건물을 지나치며 걷기를 40분. 완전히 길을 잃었다.
밤 10시가 다 되어가는 프라하 골목은 무서웠다. 문 닫은 상점들도 많았고, 술에 취한듯 비틀거리는 행인들과는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피했다. 으슥한 골목길에서는 360도 회전이 가능한 CCTV인 마냥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걸어냈다. 숙소 근처에서 샀으면 됐을 생수와 맥주를 괜히 먼저 사서 무거운 가방과 3만보 도보 투어로 퉁퉁 부은 다리와 길잃은 불안한 마음에 짜증까지 났다. 거의 울기 직전에 트램 정류장을 발견했지만, 낯선 지명은 흰건 종이요 검은건 글씨였다. 구글 맵에 완전히 의존한채 여행을 하는 IT노예라서, 인터넷이 안 되는 상황에서는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되었다. 다행히 정류장에는 두 세명의 사람이 있었고, 바출라프 광장으로 가려면 몇 번을 타야하는지 겨우겨우 물어 탈 수 있었다.
저멀리서 트램이 고개를 빼꼼 내 밀고 다가올 때는 감격스러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무거운 가방과 다리를 두고 의자에 털 썩 앉았을 때는 마치 맥주 한 모금을 마신듯한 개운함 마저 느 낄 수 있었다. 카를교에서 20분이면 도착할 숙소에 1시간 반이 넘어 들어왔다.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고자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고 면세점에서 산 러쉬 입욕제를 넣고 보니 향기로운 향이 가득 퍼진다. 한 발 넣으니 찌릿찌릿 했고, 두 발 그리고 온 몸을 넣고 보니 그 뜨끈함에 피로가 싹 가시는 듯 했다. 그러고는 자연스레 오늘 하루를 복기하다 그 어떤 여행지의 추억 보다, 길 잃은 마지막이 더 기억에 남았다.
살다보면 크고 작은 일에서 오늘과 같은 선택의 순간을 맞이하 게 된다. 누가봐도 순탄해 보이는 곳을 택해 무난하게 지나가거나, 괜한 모험심에 다른 것을 선택하며 뜻하지 않은 행운을 얻기도 하고 사서 고생을 하기도 한다. 의미없는 행동인 것을 알면서도 지난 날의 선택을 후회하며 ‘만약에 다른 결정을 했 더라면’이라는 if를 남발하기도 한다. 내가 그랬다. 내가 가보지 않은 길에 미련을 두며 왠지 더 괜찮을 것만 같고, 지금 내 길은 더 어렵고 힘든 것 같다고 생각했다.
탄생이라는 인류 최고의 순간 다음으로 중요하다는 대학 입시를 나는 어처구니 없게 결정했었다. 어린시절 아빠의 옷지원 덕에 동네 뽄쟁이로 자라온 나에게 패션은 운명처럼 느껴졌고 내가 아니면 누가 가나 싶어 호기롭게 ‘의류학과’에 진학했다. 입학하고 3개월 만에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입시미술을 할 정도로 그림을 잘 그렸던 동기들과 달리 소질이 없던 나는 아트드로잉 수업을 따라가기에는 벅찼고, 해외 유명 브랜드는 듣도 보도 못한 것들이 많아 딴세상 이야기 같았다. 서울에 와서야 빈폴과 폴로 브랜드의 차이를 알게 됐는데, 사실 엄마가 입학 선물로 가방을 사 주신다고 하시길래 “요즘 여대생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폴머시기 가방 사주세요!”라고 말 하고 거금을 들여 산 가방은 내가 원한 폴로 캔버스 백이 아닌 빈폴 숄더백이었다. 그때 혼자서 얼굴이 새빨갛게 붉어져서는 ‘아이고 네가 무슨 패션을 전공 한다고 여기 와있니?’ 싶었다.
일주일에 5일은 과제를 해내느라 밤을 지새우는 날이 많았고, 새벽달을 보며 미싱질을 하고 있는 밤에는 재미도 없는 이 일을 평생 해야하는걸까 하며 잘못된 선택에 후회를 하기도 했다. 코트를 만드는 과제에서는 주머니를 같이 박아버려 파격적으로 포켓을 없앴고, 옷으로 만들면 안되는 소재를 선택해서 패션계의 살바도르 달리가 될뻔 했다. 못하니까 점점 더 하기 싫어졌고 주눅이 들어 어깨는 축 쳐지고 자신감 잃은 내 모습을 숨기기 바빴다. 잘 하지도 못할거면서 비싼 돈 들여 서울에 온 것을 후회했고, 일생일대의 중요한 선택을 그저 ‘운명’이나 논하며 선택한 것 같아 내 자신이 한심했다. 그리고 “너는 알아서 잘 하니까. 엄마아빠는 널 믿는다.”라며,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 중대사 앞에서도 ‘엄마아빠는 잘 모르니까’라며 모든 책임을 나에게 돌린 부모님도 괜히 원망스러웠다.
다른 대학을 갔거나 전혀 다른 전공을 선택했더라면 삶이 나아 졌을지도 모른다는 못난 생각을 여러번 했었다. 내 인생은 목적지에 한번에 쭉 가지 않고 여러 경유지를 둘러둘러 조금은 더 어렵게, 느리게 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집안의 사정까지 겹쳐 나의 찬란한 20대는 빛을 잃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다 우연히 하고싶은 일이 생겼고, 그것은 옷 만드는 일과는 다르게 밤을 지새워도 재미있었고 잘 하고 싶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알게 된 CS 컨설턴트라는 직업은 그렇게 내 인생을 또 다른 길에 발을 내딛게 해주었다. 대학교 3학년 때부터 한우물을 꾸준히 판 결과 운 좋게 S통신 사의 CS 교육 강사로 취업할 수 있었다. 보통 CS강사는 갓 졸 업한 대졸자를 채용하는 것이 드문 일이었는데, 당시에는 신입 강사의 대규모 채용이 이루어지던 시기였던터라 문을 두드릴 수 있었다. 강사가 어떤 일을 하는지 이해를 하기도 전에 강사가 되었고, 기쎈 여자들이 득실거리는 먹히고 먹히는 정글에 들어가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도 무서울 것 없는 사 람들이었는데, 그녀들의 텃세에 기가 죽어 잠도 못 이루고 화장실에서 숨죽여 울기도 여러번이었다.
한달 두달 시간이 흐르며 노하우가 쌓여갔고, 공부하듯이 일을 한 결과 인정도 받았고 재미도 있었다. 그러다 직장인 3년차에 찾아온다는 그 병이 내게도 왔다. 내가 하는 일이 점점 의미 없어 보였고, 보여주기 위한 교육과 안하무인 일부 학습자들에게 점점 질리기 시작했다. 열심히 하지 않으면서 연차와 인맥을 내세워 자리를 차지하고 좋은 평가를 받는 동료를 보며 더 이상 내가 있을 곳이 못 되구나 싶었다. 그리고 직접 해보지도 않고 사람들에게 좋은 말만 전달하는 앵무새가 된 것 같아서 점점 내 일에 자신이 없어졌다. 다시 모험을 해보기로 하고, 강사 일을 하면서 가장 열정적으로 몰두 했었던 ‘조직문화’라는 일을 좀 더 전문적으로 해보기 위해 이직을 하게 되었다.
길을 잃었다 싶을 때마다 한두 발짝 앞에서 작은 빛이 반짝 거리며 이쪽으로 오라 손짓한다. 마치 해리포터의 ‘루모스 (Lumos)’ 마법주문처럼 말이다. 잃었다가 찾았다가 좌절했다 극복하고 또 웃게 된다. 수많은 이들의 인생이 그렇다. 나는 여러 길을 돌고 돌아 지금은 조직문화를 만들어가는 일을 하고 있다. 그 어떤 일보다 가슴은 뜨겁게 그리고 진지하게 나의 발자취를 하나씩 그려나가는 중이다. 이 길도 어쩌면 미래의 또 다른 나의 모습을 위해 거치는 경유지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내 모습이 어떨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동안 보내온 시간이 겹겹이 쌓여 지금 보다는 성숙된 인간이 되어 있을 것이란 것이다.
스무살 디자인 못하는 의류학도생이 겪었던 그 시간 덕에 비전 공자 보다는 엣지 한스푼 더해 감각적으로 일하는 회사원 나씨 를 만들었듯, 좋든 싫든 1부터 999까지 다른 제각각의 학습자 를 코칭하며 인간의 이해를 남들보다는 10만큼 더 할 수 있게 된 것처럼 흐르는 세월 속에 지금보다는 나은 인간이 될테다.
잃고 찾고를 반복한 결과물이 곧 나다. 오늘 여행의 마지막, 불평불만 많았던 힘들었던 순간들 덕에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평소보다는 더 개운한 것처럼, 돌고 돌아 곱절은 더 힘든 나의 길 덕에 쫌 더 짜릿하고 벅찬 어느 순간 이 올 것이다.
무언가 시도하기를 망설이고 있다면 더 주저하지 말고 시도해보는 것이 좋다.
망설이며 보내는 시간이 더 아까워지기 전에.
공부든, 꿈이든, 사랑이든.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더 나은 선택은 무엇이라도 해보는 거다.
- 연글, 연글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