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틸리아노, 소라노 그리고 사투르니아
이탈리아에서 자동차로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 곳을 추천해달라면 항상 토스카나(Toscana)를 꼽는다. 물론 이탈리아에서 이 곳이 최고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여러 번의 이탈리아 여행에서 가장 즐거웠던 경험을 선사했던 여행지이기 때문이다. 토스카나에 머물면서 피렌체(Firenze), 시에나(Siena), 산 지미냐노(San Gimignano), 아레초(Arezzo)와 같은 유명한 도시들을 다녀왔지만, 사실 마음을 가장 끌어들인 건 그보다 더 작은 마을들이었다.
처음 이탈리아 여행을 계획할 때만 해도 루트에는 없었던 곳이었는데, 우리를 이 마을로 이끈 건 오르비에토(Orvieto)에서 묵었던 B&B 주인이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거실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오늘 여행은 어땠냐며 먼저 말을 걸어왔다. 항상 비슷한 내용으로 귀결된다고 하더라도, 여행자들과 이야기하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고 특히 숙소 주인이라면 지역의 정보에도 빠삭하기 때문에 들어둬서 손해 볼 것이 없었기에 그의 질문에 웃으며 대답했다.
이탈리아를 꼭 차로 여행해보고 싶었다는 상투적인 여행 이야기와 함께, 앞으로의 일정을 간략하게 이야기하자 그의 추천이 이어졌다. 원래 토스카나 출신인데, 와이프와 결혼하면서 움브리아(Umbria)의 오르비에토로 이사했다는 그는 여전히 자신의 마음의 고향은 토스카나라고 이야기했다. 우리가 가려던 도시들은 좋은 것은 맞지만, 만약 일정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면 더 작은 도시들도 들러보라며 여러 이름들을 언급했다.
그중에서도 귀가 쫑긋하게 만들었던 건 사투르니아(Sturnia)라는 마을이었다. 계단식의 우윳빛 자연온천이 있다는 이야기에는 그리 흔들리지 않았지만, 미소와 함께 가져온 한 장의 사진을 보고 바로 다음날 일정을 그곳으로 변경해 버렸다. 오르비에토에서 그리 먼 거리는 아니지만, 가는 길에 피틸리아노(Pitigliano)와 소라노(Sorano)를 들렸다가 오후 나절에 들려서 1박을 해 볼 것을 추천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사투르니아는 고급 온천 리조트가 있는 곳으로도 유명했다.
아침 10시나 되어야 움직이던 평소와는 달리, 이날은 9시도 채 되기 전에 숙소를 빠져나왔다. 우리 스타일 상 한번 지체되기 시작하면 자칫 해질 때쯤에야 최종 목적지에 도착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오르비에토에서 피틸리아노까지는 1시간 거리. 구불구불한 국도를 따라 달리는 길이었지만, 계속해서 펼쳐지는 풍경 덕분에 지루함 없이 도착할 수 있었다. 마을 내에는 주차공간이 없어 약간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워놓고 마을로 들어가는 진입로에 선 순간 피틸리아노의 풍경이 눈 앞에 들어왔다.
아주 작은 마을을 상상했는데, 실제로 도착해보니 생각보다 큰 곳이었다. 절벽을 따라 이어져 있는 건물들의 모습은 확실히 독특함을 주기에 충분했다. 피틸리아노의 볼거리는 오르시니 가문의 궁전과 수로라고 했지만, 우리의 이탈리아 여행은 그저 마을 안을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에 굳이 구경해야 할 필요를 못 느꼈다. 사실, 입구까지 가보고 들어가 봐도 별 거 없겠네 라고 생각했던 거지만. 긴 유럽여행 동안 그런 궁전들은 차고 넘치게 봤기 때문이었다.
피틸리아노는 전형적인 토스카나 지방의 아기자기한 마을이었다. 두개의 메인 거리를 따라 한 바퀴를 돌면 다 구경할 수 있을 정도의 작은 마을로, 그냥 둘러보기만 한다면 2-3시간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딱히 여행자들이 많거나 한 마을도 아니었기 때문에 부담 없이 사진을 찍으며 마을 구석구석을 탐험해 볼 수 있었다. 여느 이탈리아의 소도시들이 그렇듯 집집마다 잘 관리해 놓은 화분들, 특유의 따뜻한 느낌이 나는 벽의 색과 아기자기한 물건들이 잘 조화를 이뤄내고 있었다.
다른 이탈리아의 큰 도시들과 좀 달랐던 건, 이 마을의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웃어주고 인사해주는 횟수였다. 눈만 마주쳐도 웃어주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던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작은 기념품을 사러 들어간 상점에서도, 그저 신기해서 들어갔던 정육점에서도, 집 앞에 걸터앉아 사람들을 구경하던 할머니도 모두 우리를 반기는 것 같았다. 우리만의 느낌이었을지 몰라도, 아니면 그날이 특히 그랬던 건지는 몰라도 어쨌든 기분 좋아지는 경험이었다.
유럽의 수많은 나라들을 여행했지만, 센스 있으면서 독특한 색감을 내는 건 이탈리아만한 곳이 없었다. 전문적으로 사진을 찍거나 하지는 않지만, 그냥 프레임에 넣기만 해도 그림같이 나오는 곳들이 많았다. 이 곳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의 센스 덕분이었겠지만, 뭐랄까 참 잘 어울리는 색을 쓴다는 느낌이 자주 들었다. 주로 회색톤의 색이 많은 우리나라와는 달리, 파스텔톤이나 원색의 사용이 많다고 해야 할까? 특히 옅은 황톳빛의 건물들은 그를 위한 배경색으로 훌륭한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그렇게 마을 구석구석 작은 골목들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다 보니 문득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다. 마을을 한 바퀴 반이나 돈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입구 초입에 있었던 몇몇 레스토랑을 제외하고는 딱히 레스토랑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배도 채울 겸 그나마 가까워 보이는 곳으로 갔는데, 관광객들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줄을 선 사람들까지 있을 정도였다. 그 옆으로 있던 몇 개의 레스토랑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바로 옆에 있던 파스타 가게의 점원에게 물어보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영어를 못했다.
혹시나 하고 이탈리아어는 아니지만, 스페인어로 필담을 하니 얼추 알아듣는 듯했다. 그리고는 그녀가 대답한 걸 이해한 게 맞다면, 여기서 200m 정도 걸어내려 가서 오른쪽으로 지하로 내려가는 형태의 레스토랑이 있는데 자기가 좋아하는 곳이라며 추천을 했다. 어차피 여기서 오래 기다리거나, 거기 갔다가 레스토랑이 없어서 돌아와도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그녀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왔던 길로 다시 되돌아갔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그곳에 레스토랑이 있었다. 입구가 상당히 좁고 아주 작게 이름이 쓰여 있어서 몰랐다면 레스토랑이라는 것조차 알아채기 어려운 곳이었지만, 대충 이쯤이겠거나 하고 와서인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지하에 가깝다 보니 천장에 있는 작은 창으로 아주 적은 빛만 들어오는 실내였지만, 조명을 꽤 많이 이용하고 있어서 분위기는 상당히 밝았다. 런치 메뉴에는 파스타와 라자냐 정도의 선택만 가능했다. 나는 뽀모도로를 골랐고, 아내는 볼로냐를 골랐다.
둘 다 페투치니면을 사용했는데, 소스의 느낌은 역시 한국과 달랐다. 뽀모도로는 토마토의 맛이 아주 강하게 났고, 볼로냐도 미트소스와 생각보다 잘 어울렸다. 뭐랄까 화려한 재료가 들어가지는 않았는데, 기본 재료 본연의 맛이 살아있는 느낌이랄까? 기대하지 않고 들어온 레스토랑의 파스타 치고는 꽤 괜찮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후식으로 주문한 커피도, 역시 이탈리아이기 때문에 날 실망시키지 않았다.
점심을 먹고 나서 시계를 보니, 생각보다 꽤 여유가 있었다. 아침에 출발할 때에는 피틸리아노에서 보낸 시간이 너무 길면 소라노를 그냥 지나치기로 했었는데, 들렸다 가도 충분히 오늘 일정을 다 소화해 낼 수 있을 것 같아 차를 소라노로 돌려 도착한 소라노는 정말 작은 마을이었다. 마을의 입구에는 마을의 지도가 있었는데, 그림상으로는 꽤 커 보였지만 실제로는 30분이면 한 바퀴를 다 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작았다.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가 소라노의 지도에서 꼭 가봐야 할 곳이라고 안내된 알도브란데스카 요새(Rocca Aldobrandesca)로 먼저 향했다. 마을 자체는 예쁘긴 하지만, 피틸리아노의 풍경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요새에 채 다다르기도 전에 우리의 관심을 끈 건 고양이들이었다. 대다수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길냥이면서도 개냥이같은 녀석들이었다. 심지어 한놈은 우리가 가볍게 쓰다듬어주자 발랑 누워서 배를 드러내기까지 했다. 몇 발자국 갈 때마다 이런 고양이들이 나타나니, 5분이면 걸어갈 수 있을 거 같았던 요새까지 가는데 무려 30분이나 걸렸다. 덕분에 수많은 고양이 사진들을 남길 수 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주변에 이 녀석들을 개냥이로 기르고 있는 주인이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아, 요새는 뭐, 특별하게 볼 건 없었다. 고양이들로 인해서, 이미 우리의 관심이 여기저기 흩어져 버렸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소라노에 간 것 까지는 좋았는데, 사투르니아까지 오는데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 내비게이션에서 알려주는 루트는 두 가지로, 멀리 돌아가는 길과 짧게 단 시간에 갈 수 있는 길이었다. 이런 경우에는 당연히 짧은 루트를 선택하기 마련인데, 이 짧은 길이라는 게 시골의 농로를 달리는 길일 거라고는 상상을 하지 못했다. 확실히 시간이 단축되기는 했지만 맞은편에서 차량이 오면 비킬 공간조차 없는 경우가 대다수였던 데다가, 심지어 비포장길이었다.
SUV는 아니었지만, 꽤 폭이 넓은 7인승 밴을 타고 다녔던지라 이런 농로를 달리는 건 여간 곤욕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구릉이 많은 토스카나 답게 길은 구불구불하고, 오르락내리락했으며 심지어 내비게이션과 다르게 길이 나있기 까지 했다. 결국, 길을 잘못 들어서는 바람에 엉뚱한 농장의 안까지 들어갔다가 나와서 한참을 헤맨 뒤에야 사투르니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래도 해가 지기 2시간 전쯤에는 도착했으니, 나름 일정에는 지장이 없어 다행이었다.
사투르니아는 사진에서 본모습 그대로였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계단식의 폭포 그대로 말이다. 별도의 입장료를 받고 있지 않기 때문인지, 주차장처럼 마련된 넓은 공간도 이미 자동차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이야기는 사람들로 가득할 것이라는 의미나 다름없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공중목욕탕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다. 여태까지 경험한 유럽의 온천은 미지근한 느낌이 대부분이었는데,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꼭 데워진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는 기분이랄까?
그래도 이 계단식 온천으로 들어가는 쪽의 입구에서는 좀 더 따뜻한 온천욕을 할 수 있었다. 물에는 뭔가 알 수 없는 벌레들이 좀 떠다니고 있어서 아내는 기겁을 하기도 했지만, 현지인들은 크게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그저 온천수 안에서 물놀이를 즐기는데 더 신경을 쓰는 듯했다. 일반 여행자들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지, 동양인이라고는 우리 둘 뿐이어서 사람들의 시선을 한 눈에 받기는 했지만 이내 금방 익숙해졌다. 어차피 신기해서 보는 거지, 경계의 눈빛이 아니었으므로 그저 웃어주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고급 온천 리조트가 여럿 있는 사투르니아에서의 하룻밤은, 리조트가 아닌 온천 바로 옆에 위치해 있던 농가 숙소였다. 위치만 확인하고 갔던 터라 설마 했었지만, 숙소 주인은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다. 이럴 땐 바디 랭귀지 하나면 충분! 손짓 발짓 그리고 필담으로 가격을 확인하고 하룻밤을 묵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숙소의 미스터리가 있었으니, 아무도 WIFI라는 단어를 이해하지 못했다. 주인도 모르고, 투숙하는 사람도 영어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분명 농장 이름의 WIFI는 있었는데,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라니! 결국, 알아보다 포기하고 인터넷 없는 저녁과 함께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