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 김기현 저, 복 있는 사람
우리는 모두 구도자(求道者)다. 구도자란 길道을 구求하는 자이다. 길은 우리의 발을 내딛는 곳이며, 우리의 존재 자체를 내던지는 곳이다. 최종 목적지가 아니다. 길은 과정이고, 거쳐 가는 곳이다. 그래서 구도자는 길 위의 존재, 과정 속에 존재하는 자이다. 섣불리 ‘완성’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내지 않는다. 끊임없이 배운다. ‘배운다는 것’은 먼저 ‘자신의 내면에 깊게 침전하는 것’이다. 동시에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고, 미련 없이 ‘밖으로 향하는 자세’이다. 따라서 예언자는 구도자이다. 하박국이 그랬고, 예레미야가 그랬고, 욥이 그랬으며 히브리 시인들도 그러했다.
예언자들은 무엇보다 고통의 문제에 민감한 자들이다. 그들은 고통의 문제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고통의 문제를 붙들고 자신의 내면에 깊게 들어갔다. “선한 창조주가 지은 이 세계에 왜 고통이 존재하는가?”, “야훼가 통치하는 이 세상에 어찌하여 악이 창궐하는가?” 이 책의 저자 또한 마찬가지다. 그는 책의 서두와, 중간에서 밝히듯 고통과 고난의 문제에 천착한 자이다. 구도자의 마음으로, 예언자적인 감수성으로 고난의 문제에 정직하게 직면했다. 그래서 본 책은 고통에 대한 저자의 파토스가 깊게 베여있다.
그렇다고 이 책을 저자 인생의 고난에 대한 간증집이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저자는 하박국서의 흐름에 따라 고통의 문제를 풀어나간다. 또한 예언자 하박국이 직면한 ‘고통의 층위’를 더욱 풍성히 하기 위해 예레미야와 욥 그리고 히브리 시인들의 도움을 구한다. 그들은 고난에 정직하게 직면한 구도자들이다. 고난을 외면하지 않고, 고난 속으로 괴롭게 침전한다. 때론 하나님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항의하고, 분노한다. 의심하기도 한다. 그러나 불경건하다고 불신앙이라고 섣불리 단죄하지 마시라. 그들의 의심은 올바른 신앙의 길道을 찾기 위한 충분조건이니까.
저자와 하박국은 내면의 세계로 침전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고난을 통해 존재의 한계를 직면한 그들은 ‘밖으로’ 향했다. 먼저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발견했다. 고난을 인내하고 근기있는 자세로 버틸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여기 있다. 그렇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믿음은 기다리는 것이고, 종말에 정의가 승리할 비젼을 보는 것이며, 그러므로 현재의 고난을 인내하는 것이다. 저자의 고백대로 “고난은 반드시 지나간다. 하나님의 의는 반드시 승리한다”.
그리고 그들은 (내면에서)밖으로 나와 용서와 공감을 발견한다. 고난 속에서 길을 구한 예언자들은 (역설적이게도)원수들을 용서했다.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용서는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그들이 깨달은 것이다. 또한 그들은 고난 받는 자신들 뿐만 아니라 고통 중에 있는 타자를 발견한다. 놀라운 것은 자신들의 고난의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고통 중에 있는 이웃을 발견하고, 눈물 흘리며 그들과 함께한다. 그렇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절정은 고난의 순간에 있었다. 고통의 탄식은 공감의 노래로 승화된다.
나는 본 책을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결코 가벼운 주제가 아닌 고통을 주제로 한 이 책을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저자의 삶이 책 속에 깊게 베여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고백대로, ‘하박국이 저자이고, 저자가 곧 하박국’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저자의 초청대로 우리가 곧 하박국이며, 그렇게 되어야 한다. 이 시대가 이다지도 불우한 까닭은 창조주 하나님을 향해 “왜 악에 침묵하시느냐” 고래고래 소리 지를 하박국이 드물어서가 아닐까?
성경과 마찬가지로 본 책은 기독교가 현재의 고난과 고통을 덜어주고 잊게 해주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기독교는 칼 맑스가 비판한대로 현실의 고난을 보지 못 하게 하는 “인민의 아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기독교는 고난과 고통을 인내 하게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으며 창조주의 일하심을 기다린다. 그저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고난에 당당히 맞서야한다. 그것이 곧 구도자로서 살아가는 우리의 자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