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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호 May 15. 2024

조제와 홍콩할머니

영화<조제>(2020)를 보았다

1. 조제


"나의 이름은 조제라고 해, 조제라고 불러줘"

조제는 사강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이다. 소설 속 주인공은 자신이 좋아하는 소설 속 주인공이 너무 좋아 자신의 이름 대신 그의 이름으로 불리기를 바랬다고 한다. 영화 <조제>의 조제도 그렇다. 사강의 소설 속 조제는 그녀가 읽은 소설 속 조제의 이름을 빌어오고 그 이름을 다시 이 영화 속 주인공이 빌어온 셈이다. 소설의 소설 속 조제는 얼마나 매력적인 인물일까? <조제>는 사강의 소설이 읽고 싶어 지는 영화이다.

 

영화 <조제> 속 조제는 갓난아이적 동인천의 한 파출소 앞에 버려졌다. 함께 보육원에서 지내던 점봉이(이제 아저씨가 되었다)의 말에 의하면 당시 보육원의 원장은 "그녀(조제)보다 더 병신 같고 악날"하였다고. 어느 날 조제는 원장의 밥에 바퀴벌레 약을 탔다. 바퀴벌레 약을 먹은 원장은 급히 응급실에 실려가 목숨을 건졌지만 도망간 조제는 자기가 사람을 죽인 줄 알고 평생을 숨어 살았다. 한 여인이 길에서 우연히 어린 조제를 만나 기르고 함께 살았다. 이제 조제는 어른이 되었고 그 여인은 노인이 되었다. 두 사람은 노인이 폐지와 빈병을 주워 판 돈으로 살아간다.


2. 만남


그는 자취방 근처 비탈길에서 조제를 처음 만났다. 넘어진 휠체어 옆에 쓰러져 있던 그녀를 발견한 그는 근처 가게에서 빌린 니어카에 고장난 휠체어를 싣고 그녀를 할머니와 사는 허름한 집에 바래다준다.


그는 지방대를 다니는 학생이다. 대부분의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대학생들처럼 그는 자취를 하고 카페에서 알바를 한다. 그 나이 또래의 대학생들은 대부분 뚜렿한 목적도 희망도 없다.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그냥 별 볼 일이 없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시대나 그러했다.  


그는 드라마에 나오는 그 나이 또래의 누구나처럼 쉽게 연애를 한다. 학교 후배와 자고 젊은 여교수 집 소파에서 졸다 그녀의 남자친구를 피해 도망 나온다. 그런 돌발적인 연애 행각은 그 나이 때에만 할 수 있는 일이라 해두자. 청춘이 부러운 것은 순진함으로 위장하고 사회가 정해 놓은 선들을 잘 모른다며, 대부분은 알면서 모른 척하며 슬쩍슬쩍 넘나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가식적인 천진함이 부럽기도 하지만, 돌아보면 그런 충동적인 행동들은 스스로의 별 볼 일 없음을 부정하려는 나름의 발악이 아니었을까도 싶다. 사랑만큼 스스로의 존재를 인정받는 일이 어디있으랴.  


당연하게도 그는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이번에는 그저 몸이 끌리고 바람에 따라 흘러가던 그런 사랑은 아니었는지 그는 조제와 꽤나 진지한 동거를 시작한다.


3.  헤어짐


사랑 이야기에서 헤어짐이란 현실의 구차함을 덮어버리고, 가장 아름다운 시기의 사진처럼 온갖 감정들을 추억이란 이름으로 미화시킨다.


영화는 5년이란 시간을 자막 한 줄로 간단히 뛰어 넘겨 버리고 그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궁금해하는 관객들에게 두 사람의 헤어짐을 덤덤하게 알린다.


조제는 오랫동안 집에 모셔둔 할머니의 유골함을 납골당에 모신다. 책을 통해 세상을 여행하고 마음으로 사람을 죽인 벌로 오랫동안 숨어 지내던 그녀는 이제 할머니를 태운 차를 몰고 납골당으로 향한다. 그 시간, 오래전 길에 넘어진 조제를 구해주었던 그는 다른 여자와의 결혼식을 앞두고 있다. 약혼녀가 모는 차 안에서 그는 두 사람 결혼식의 청첩장을 펼쳐본다. "결혼식은 겨울에 하는 게 싸."


신호에 멈춘 그들의 차 옆에 다른 차 한 대가 멈추어 선다. 조제가 운전하는 차이다. 하필이면 그렇다. 조제와 그가 눈이라도 마주친다면? 순간 마음을 졸인다. 하지만 그와 조제는 서로를 보지 못한다. 당신은 혹시?하고 기대했겠지만 그런 일은 영화에도 없다. 신호가 바뀌고 조제의 차는 크게 원을 그리며 좌회전을 하고 그가 탄 차는 직진을 하며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길을 간다.  


4. 그리움


<조제>는 여느 영화처럼 두 남녀가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는 이야기이다. 보육원 원장의 밥에 바퀴벌레 약을 타고 도망 나와 평생을 숨어 살던, 하반신이 불구인 장애인 여인과 평범한 지방대생이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진다. 조제가 이보다 더 독특한 캐릭터였다 하더라도, 조제와 그의 만남과 헤어짐이 보다 복잡한 플롯을 지녔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는 이야기이다. 그렇지 않은 사랑 이야기가 어디 있으랴.


조제는 그와 헤어졌지만 여전히 그와 함께 여행을 한다. 핸드폰 속 스코틀랜드의 풍경을 보며 그와 함께 스카치위스키의 산지를 여행하는 상상을 한다. "나는 네가 내 옆에 없어도 너와 함께 있을 수 있어" 하늘처럼 높고 넓은 수족관 앞에서 휠체어에 앉은 조제는 그에게 말했다. 그에게 전하는 이별의 말이었다.


  영화는 두 사람의 마음속에 묻혀있던 그리움을 덤덤하게 들춘다. 마음에 자리를 남기지 않는 헤어짐이 어디 있을까. 모든 사랑 이야기는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그리고 문득문득 그리워하는 이야기이다. 모든 이야기가 비슷하고 누구나 한 번은 그런 이야기가 있다. 누구나 하나쯤 그런 그리움을 누르고 묻고 안고 살아간다.  


5. 호랑이 그리고 홍콩할매


"혹시 호랑이가 담을 넘어왔더라도 나는 무섭지 않았을 거야 너와 함께 있으니까"


조제와 그가 함께 있는 어느 밤, 오래된 담벼락 가운데 뚫린 구멍 사이로 조제는 호랑이를 본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혼자서 밤을 지내야 했던 조제는 매일 밤 담너머의 호랑이를 보고 두려움에 떨며 잠들었을 것이다. 담벼락 너머의 공포, 호랑이는 여전히 어슬렁 거리지만 사랑하는 그와 함께이면 함께 있다면 이제 두려울 것이 없다. 행여 호랑이가 담을 넘어오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잡혀 먹히는 것도 두렵지 않은 법이다. "내가 먼저 호랑이에게 먹히고 있을 테니 사이에 너는 도망가." 사랑하는 이들이 얼마나 무모한 지를 사랑에 빠져있는 이들만 모른다.


조제가 본 담너머 호랑이는 많은 의미를 함축한 멋진 장치이다. 하지만 처음에는 왠지 호랑이의 등장이 뜬금없다고 생각되었다. 뜬금이 없는 등장이란 생각을 하니 뜬금없이 홍콩할매 이야기가 떠오른다. 똑똑, 밤에 누가 창을 두드려 창문을 열면 한 할매가 길을 물어본다는 것이다. 잠결에 이래저래 길을 가르쳐 주고 창문을 닫았는 데 생각해 보니 우리 집은 10층! 이런 식으로 한 동안 초딩들 사이에 퍼져나가던 귀신이야기이다. 분명 귀신 이야기에 무섭기까지 한데 할매의 뜬금없는 등장에 풋! 하고 웃음까지 나온다. 조제가 담벼락 구멍으로 호랑이 대신 홍콩할매를 보았다면 어땠을까? 영화의 감상을 망치는 뜬금없는 상상일세.

 

오랜만에 좋은 영화를 보았다. 원작인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2003)을 다시 한번 보아야겠다. 그리고 조금 더 한가해진다면 사강의 조제를 만나보고 싶다. 소설의 이름은 <한 달 후 일 년 후>란다. 여름 비에 추억이 촉촉하게 되살아 나는 오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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