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화폐와 수령
통화질서 회복을 위한 노력은 1946년 1월 15일, 북조선 중앙은행의 창설로부터 시작되었다. 소련 정부의 차관 1억 엔이 자본금으로 적립되었고 총재로 베쁘리꼬프가 임명되었다. 이어서 북조선 임시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농업개발금융을 촉진하기 위한 북조선 농민은행도 창설되었다. 1946년 10월 29일부터 은행 지도업무를 인수한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는 북조선중앙은행과 북조선농민은행의 본점 및 지점ㆍ출장소만 남기고 모든 금융기관을 해산시켰다. 은행의 국가 독점을 단행한 것이다. 그러나 국가 독점 신용체계의 정비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신용 결핍은 해소되지 못했다. 가장 주요한 원인은 북조선중앙은행이 화폐발행권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 문제에 대하여 김일성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아직 자주적인 화페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지금 북조선 지역에서는 《조선은행권》과 《붉은 군표》가 류통되고 있습니다. 《조선은행권》은 북조선에서 뿐 아니라 남조선에서도 류통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화페가 류통되고 통화량조차 알 수 없는 《조선은행권》이 통용되는 화페제도를 그대로 두고서는 인민경제의 재정계획을 정확히 세울 수 없습니다. 계획경제에 부합되는 화페제도를 수립하여야 경제를 빨리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김일성, “화페개혁을 실시할 데 대하여”(1947.12.1), 『김일성저작집 3』(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79), p. 518.
한편, 해방 이후 통화질서 교란에 한 축을 담당한 것은 소련군의 군표였다. 1945년 9월 19일부터 발행되어 강제 통용력을 갖게 된 소련 군표는 북한 주민들의 반감에도 불구하고 급속도로 점유율을 높이게 된다.
【그림】 유통 화폐량 중 소련 군표의 비중
붉은 군표는 발행되기 시작하여 6개월이 못 미치는 1946년 2월에 이르러 전체 유통화폐 중 53%를 점유하게 된다. 1947년 화폐개혁 무렵에는 92.3%에 달하게 되는데, 사실상 ‘붉은 군표’가 국정화폐의 자리를 차지함을 의미했다. 군표 범람에 의한 통화팽창은 시장물가를 폭등시키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다. 북한의 화폐 증가율은 1945년 8월 15일을 기준으로 할 때, 1947년 12월 6일 현재 455.5%에 달했다. 생필품의 시장물가는 1946년에는 373%, 1947년에는 742.5%로 상승했다. 물가상승률은 화폐 증가율을 상회하여 악성 인플레이션의 징후를 나타냈다. 소련 군정의 군표 남발은 식민지 체제의 붕괴와 남북 경제 악화에 따른 생산 감퇴, 생필품 부족에서 기인하는 구조적인 현상을 뛰어넘어 물가상승을 부채질하는 가장 위협적인 요인이 되었다.
군표 발행을 통한 주둔군 유지비 조달은 소련의 정치경제적 부담을 가중시켰다. 사실 군표는 북한의 주민들로부터 구입한 생필품과 공산품의 대금을 소련 정부가 지불해 줄 것을 보증한 약속어음이었다.
소련군 사령부는 군표 발행의 부담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1946년 12월부터 화폐개혁을 구상하고 실행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1947년 10월 소련군 사령부는 화폐개혁의 진정한 이유가 군표 유통 정지에 있다는 속내를 감추고 다른 명분을 내세운다. 남한으로부터 반입되는 위조지폐가 북한의 경제를 교란시켜 투기를 발생시키고 물가를 불안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김일성 또한 소련 측의 기획에 맞추어 화폐개혁의 필연성을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미제국주의자들과 그 주구들은 《조선은행권》이 남북조선에서 통용되고 있는 것을 리용하여 280억 원에 달하는 지페를 망탕 찍어 그것을 북조선에 침투시켜 시장에서 많은 상품과 식량을 렴가로 사서 남조선으로 가져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물가를 폭등시키고 우리 인민들의 생활에 불안을 조성하며 나아가서는 인민들 속에서 인민정권에 대한 불만을 야기시켜 인민들과 인민정권을 리탈시키며 계획경제를 파탄시키려고 합니다. 미제와 그 주구들의 이와 같은 책동을 분쇄하기 위하여 우리는 새 화페를 발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김일성, “화페개혁을 실시할 데 대하여”(1947.12.1), 『김일성저작집 3』(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79), p. 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