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식구 변천사
2017년 초 4개월 남짓 미국에 있는 고모와 함께 살게 되었다. 항상 바빴던 고모와 같이 밥을 먹을 수 있는 날은 일주일 중 일요일 점심 한 끼였다. 교회에 다녀온 후 고모는 내게 돈을 준다. 나는 그것을 받아 들고 걸어서 3분 거리에 있는 할랄 음식점에 가 늘 먹던 것을 주문한다. 그것은 영어를 한마디라도 더 시키기 위한 고모 나름의 교육법이었으리라. 고모는 이 시간에 한동안 내게 일어났던 일이라던가 그런 일상적인 질문을 던졌다. 우린 같은 성씨라는 울타리 안에 존재했지만 태어나서 고작 두 번 본 고모는 타국에서 먹는 이 낯선 음식만큼이나 적응하기 힘들었다. 우리는 그렇게 4개월 간의 짧은 식사를 함께했다. 이것은 내가 가족이 아닌 자와 함께 지내게 된 첫 번째 경험이었다. 나는 이 이후로도 타인과 함께 지내게 되는 일이 많았다. 요즘 뭘 먹고 다니냐(?)는 질문을 받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는 옆에 누가 있느냐에 따라먹는 것이 달라지는 경향이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한 끼에 특별하고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는 나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두 번째는 나의 언니이다. 미국에서 돌아와 복학을 준비하던 나와 먼 곳에 직장을 구해 집에서 출퇴근을 하던 언니의 사정을 고려한 엄마의 결정으로 방을 얻어 나가기로 한 것이다. 같은 부모 아래 자랐지만 정반대인 언니와 딱 하나 맞는 것이 바로 식성이었다. 직장인인 언니와 알바몬이었던 나는 용돈을 타 쓰던 예전만큼 경제적으로 쪼들리지도 않았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식탐을 말릴 부모님의 품에서 벗어난 상태였다. 우리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이것저것 사 먹곤 했다. 식탁도 없는 조그만 방 한 칸에서 티비 앞에 쪼그려 앉아 불스 떡볶이를 먹으며 보던 학교괴담이 아직도 종종 생각이 난다. 친구도 많고 인기가 많았던 언니를 나는 정말 좋아했다. 언니가 결혼을 준비하게 되면서 이 즐거운 먹보 생활도 금방 끝나버렸다. 이 시기는 내게 정말 힘들었던 시기였는데 언니와 함께 먹던 순간만큼은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세 번째는 대학 동기이다. 친구와 나는 워킹홀리데이를 떠나 호주 멜버른 어딘가에 정착했다. 우린 일하는 곳도 생활패턴도 모두 달랐지만 매주 목요일마다 꼭 저녁을 함께 먹었다. 목요일 저녁은 한국에서처럼 월-금 9 to 6 근무를 했던 나와 스케줄 근무를 했던 친구의 적절한 합의점이었다. 이 특별한 저녁에는 규칙이 있었다.
1. 인당 50불씩 부담할 것
2. 매주 번갈아가면서 가고 싶은 식당을 선정할 것
우리는 그렇게 매주 목요일이 되면 한 끼에 100불을 쓰는 부자 워홀러(?)가 되었다. 어떤 날은 말레이시아 음식을 먹기도 하고 어떤 날은 한국식 바비큐 집에서 그리운 고향의 맛을 느끼기도 했다. 적응하기 쉽지 않은 타국에서 매주 목요일 같은 나라 말을 하는 이와의 대화는 한 주를 버티게 하는 힘이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무언가를 같이 먹는 행위는 그것 자체로 나에게 큰 선물같이 느껴진다. 그래서 요즘은 무얼 먹고 지내느냐... 먹는 걸 무지하게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이것저것 원 없이 먹고사는 중이다. 덤으로 딸려오는 살들은 잠깐 모른척하고 (눈물) 나에게 허락된 하루 한 끼를 소중하게 생각하며 무얼 먹을지 오늘도 고민한다. 이 글을 읽는 당신과도 맛있는 걸 함께 먹고 싶다. 우리가 다시 만날 날이 얼른 다가와주기를 소망하면서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