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를 마치고 퇴근하면 난 작가처럼 살려고 애쓴다. 종일 사무실에서 고개를 처박고 일하다가 때가 되면 헬스장에 들르고 저녁밥을 허겁지겁 먹을 때까지만 샐러리맨 박 아무개다. 퇴근하려고 돌아서는 나를 막는 자는 적과 같다. 눈빛으로 죽일 듯 쏘아본다. 허기는 공격성을 자아내고, 지적 허영은 날랜 발걸음의 소산이다. 그렇게 소화가 채 되기도 전에 카페에 앉으면 작가 입네 하고 뭐라도 쓴다. 애석하게도 깜깜해진 후에야 진짜 나를 찾겠다며 설치는 꼴이다. 그래서 밤은 피로하고 조급하며 초조하다. 눈이 가물가물하고 몸에 힘이 착 풀린 상태로 쓰는 글은 우울하다. 글 좀 쓰겠다고 해봤자 영업 종료까지는 채 2시간도 남지 않는다. 글솜씨는 요지부동인데 나날이 체력은 떨어져 간다. 그래도 커피잔을 손에 들면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카페에서 보내는 시간이 없다면 오늘 하루도 무의미하게 사그라들 예정이었다. 하지만 난 엄연히 노란색 불빛 아래서 여러 사람과 함께 눈을 부라리고 있으니 어쨌든 뭐라도 쓸 것이다. 언젠가는 죽이는 걸 써서 세상에 패대기칠 날이 오겠지. 출판계와 독자들에게 원고를 들이밀며 뻐기고 싶다. '거, 두고 봐. 기막힌 거 가지고 온다고.' 독자와 출판사여, 새해에는 두고 보자.
오늘의 글쓰기 주제는 '22년의 나다. 난 올해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친한 동생은 점집에서 신년 운세라도 보러 가던데, 나는 요행에는 관심이 없다. 나락에 떨어지든 비탈에 올라서든 연이은 선택 아닌가. 지금 패기 같아서는 뭐라도 할 것 같은데, 막상 닥쳐오면 작년과 별반 다를 게 없을 것이다. 현상 유지라면 그런대로 만족한다.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건 지루해지지 않는다는 말이니까. 여전히 재밌다는 증거니까. 탁자에 소설과 비소설 책을 한 권씩을 올려두고 노트북을 켜면서 빙그레 웃을 수 있다면 절반의 성공이다. 그러니까 내 새해 소망은 지치지 않는 것이다. 어제 쓰던 원고를 다시 붙들어도 재미가 있다면 그만이다. 퇴근 후의 여유라니 당치도 않다. 난 더 열심히 쓰고 싶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별 소득도 없이 캄캄한 침대맡에서 끔찍한 기분에 시달릴 게 뻔하다. 시시때때로 인스타그램을 켰다간 그것으로 끝이다. 뮤지컬 배우들처럼 요란한 그들과 나를 견주고 나면 남는 게 없다. 다들 떠들썩할 때 난 더 나은 글을 쓰고 꽤 많이 읽어서 변명의 여지가 없이 하루를 보낼 것이다. 지체 없이 날 몰아세울 것이다. 영화 <위플래쉬>를 보고 죄다 폭력적인 선생을 비난하며 혀를 찰 때도, 난 학대당하는 학생을 부러워했다. "저렇게 막 다뤄져도 예술적인 성취를 이뤄낼 수 있다면 내 기꺼이 오른뺨을 내밀리라" 오히려 내가 검정 쫄티를 좋아해서 그런지 가학적이고 변태 같은 플레처 교수가 남 같지 않았다. 때리든 맞든 뭐가 됐든 새해에는 좋은 책을 내고 싶다. 이런 마음가짐을 갖고 카페에 앉으면 싸우는 기분이 들 수밖에 없다. 섀도복싱을 하며 입으로 취취 거린다. 난 그걸 지루하지 않기 위한 싸움이라고 칭하길 좋아한다. 써야 할 글과 읽어야 할 책 사이를 진자 운동하며 허무와 권태를 날렵하게 비껴간다. 새해에는 누가 뭐래도 인파이팅이다.
내 친구 중에 멍을 잘 때리는 멍 전문가가 있다. 내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행위다. 불 보면 불멍이고, 풀 보면 풀멍이라는데 나는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멍은 정신이 나간 얼떨떨한 상태를 말한다. 내 머리는 늘 부산스럽고 서울 교통보다 복잡한데 멍이 깃들 리 없다. 멍은커녕 일과가 느슨해지면 도통 견뎌내질 못한다. 킬링타임용 뭐라고 부르는 것들을 혐오한다. 난 뭐라도 해야 한다. 정말 할 게 없으면 적어도 생각하느라 바빠야 한다. 주말 간에 PCR 검사를 했는데, 주차하고 보니 임시 검사소 천막 주위로 엄청나게 긴 줄이 있었다. 다들 이 긴 줄을 언제 기다리냐고 불평을 해댔다. 하지만 난 개의치 않고 아이폰으로 읽던 소설을 틀었다. 추운 날씨에 패딩을 입고 서서 핸드폰에 고개를 처박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난 이 시간 낭비하지 않을 거거든! 님포매니악에 가까운 성욕을 가진 30대 여성이 이 남자 저 남자와 데이트를 하는 장면이었다. 파리 시내를 배경으로 곡예를 하듯 이 침대 저 침대를 섭렵하는 여성의 분방함에 난 혀를 찼다. 역시 프랑스는 참 좋은 나라야. 줄은 요지부동으로 꽉 막혀있었지만 난 파리 17구를 거니는 느낌으로 소설의 반을 읽어냈다. 내 앞에 서 있는 아저씨는 먼 산을 봤고, 내 뒷줄은 학생은 고스톱 게임을 즐겼지만, 난 그 사이에 몽마르트르 언덕도 올라갔다 왔다. 책이라도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새해에는 내 부산스러운 정신을 강원도 정선 구절리의, 여느 산간마을처럼 한산하게 해보려고 한다.
내가 이렇게 바쁘게 산다고 뭔가 막 이뤄냈으리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누가 그 나이를 먹도록 뭐 했냐고 물으면 떳떳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생각하느라 바빴다고 대답해야 하나. 아마도 수많은 책과 영화를 봤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머리를 긁적이며 잘 놀았다고 말끝을 흐릴 것이다. 읽고 쓰는 거 외엔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삶이 그렇게 단순해져 버렸다. 나라는 존재를 다 발라내면 앙상한 뼈 외에 예스 24 골드 등급이 남아있을 것이다. 한 달에 두 번 무료배송에 이천 원 할인쿠폰이 잔뜩 쌓여있다. 난 미니멀리스트니까 새해에는 이북을 읽고 책을 좀 덜 사야겠다.
내가 악몽처럼 두려워하는 소설이 있다면 그건 카프카의 <변신>이다. 평범한 외판원이었던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벌레가 된 채 깨어난다. 그레고르는 이웃과 동료 심지어 가족까지 자신을 못 알아보자 절망한다. 그리고 끝내 자기 자신도 내가 뭐 하는 녀석인지 까먹는다. 아니 애초에 알긴 했을까.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이 정말 나 맞나. 고작 그 껍데기가 나의 전부라고? 1915년에 출간한 카프카의 <변신>은 유대인이자 체코인으로 독일에 살았던 카프카의 복잡한 속내를 보여주는 작품이지만, 내겐 타인을 통하지 않고서는 내가 나라는 것을 증명해내지 못하는 자기부정의 이야기로 보였다. 이 불안은 전적으로 내가 지닌 불안이기도 하다. 과연 내가 읽고 쓰는 글이 없다면 나를 누구라고 감히 입밖에 낼 수 있을까. 난 어떤 사람일까. 사람들이 내 겉모습 외에 발견할 수 있는 속성은 무엇일까. 사는 것도 바쁜데 굳이 나를 기억해줄까. 난 지금 무언가로 기억되고 싶다는 욕구를 적고 있다. 몸서리치게 추한 짓이다. 술자리만 가면 그렇게 세상을 떠서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게 지워지고 싶다며 개폼을 잡았는데, 여전히 난 책을 출간해서 알라딘 중고서점에 남기려고 한다. 내 싸인본 책 판 새끼는 뒤졌다. 먼지도 안 나게 맞을 줄 알아라. 그렇다. 난 앞뒤가 안 맞는 모순투성이다. 새해에는 이런 가식의 껍데기를 떨쳐버리고 싶다.
난 베로니카처럼 이중생활을 하고 싶다. 평범하게 돈을 버는 나와 그 평범함을 등지고 뭐라고 되고 싶은 나의 분신을 공존시키고 싶다. 내 글이 보통 그런 분신술의 잔여물이다. 영화감독 키에슬로프스키는 쌍둥이처럼 똑같이 생긴 여자애 둘이 같은 날, 같은 도시에 태어나는 영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을 만들었다. 폴란드에는 베로니카가 있고, 프랑스에는 베로니끄가 산다. 둘은 텔레파시처럼 어렴풋하게나마 서로의 존재를 의식한다. 나와 똑같이 생겼고 기질과 감정마저 똑 닮은, 그렇지만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자란 누군가가 있다는 걸 느낀다. 밥을 먹고 거리를 걸을 때도 그 쌍둥이처럼 똑 닮은 이를 찾기도 한다. 나라는 사람의 다른 버전인 그는 어쩌면 내가 미처 누리지 못한 가능성일지도 모른다. 직장을 다니면서 전업 작가를 꿈꾸는 박민진이가 아니라, 문예창작학과를 나와, 서울 어느 신문사에서 주최한 문학상에서 작은 상을 타고 가난하지만 꿋꿋하게 작가로 살아가는 박민진 2.0을 꿈꾼다. 그는 하기도 싫은 일에 애를 쓰는 나와 달리 평단과 대중의 주목을 받는 예술가로 자리를 잡는다. 초기엔 어려움도 있었지만 끝내 포기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전업 작가의 꿈을 이뤄낸다. 물론 다른 버전의 상상도 한다. 이른바 박민진 3.0이다. 이건 상당한 망작이다. 꿈은커녕 하는 짓마다 실패해서 개털이 된 패배자다. 마누라 속이나 썩이는 얼간이다. 기술이나 배우라는 아버지의 말을 무시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형편없는 놈이다. 어떤 게 더 그럴싸한 예측일까. 인생은 한 번 뿐이기에 알 수가 없다. 리허설도 없으니 더더욱 용기를 내기 어렵다. 독일 속담에 einmal ist keinmal(아인만 이스트 카인말)이라는 말이 있다. 한 번은 중요치 않다는 뜻이다.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이 말을 인용하여,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고 했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란다. 실패를 시인하는 말 같아서 입에 올리기 싫지만, 글을 쓸 땐 구실로 삼을만한 글귀다. 난 어떤 가능성을 품고 사는 걸까. 개패를 들고도 돈을 따려고 뻥카를 치는 무뢰한은 아니겠지. 새해에는 부디 박민진 버전 투 쓰리가 울고 갈 또 다른 버전의 내가 보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