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이런저런 할 일의 연속이다. 내가 살면서 얻어낸 책무와 끝내야 하는 원고, 잊으면 안 될 일정의 연속이 되었다. 난 일로 정신이 없다. 내 삶은 그렇게 일이 치인다는 것이 곧 성공을 알리는 징표이기라도 한 듯, 끊임없이 '아 이거 해야 해'라고 중얼거린다. 내 삶은 용량을 초과해서, 남은 자리는 겨우 헬스장을 위한 시간뿐이다. 무언가를 응시하고 사색할 자리는 전혀 없다. 퇴사를 결정할 땐 내 삶이 사색덩어리일 줄 알았다. 유유자적 신선놀음할 줄 알았던 건 아니지만 좀 더 잘 벼려서 생각할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도 역시 흘러가고 있다. 물을 쏟은 바닥처럼 시간이 흥건하다.
난 시내와 동네를 뛰어다니고, 사람들과 식사를 하며 요즘 근황을 묻는다. 그땐 수입과 지출이라는 명확한 수치가 사라지나 싶지만 여전히 머릿속에서는 빨리 가서 일할 생각만 한다. 집에 들어오면 그때부터는 다시 할 일의 시작이다. 책상 우의 메모장, 포스트잇, 또는 책 귀퉁이에 적은 메모가 날 닦달한다. 여기저기에서 해치워 달라고 아우성이다. 난 그것들을 다 어디에 두었는지 찾느라 시간을 허비한다. 그 모록을 잃어버리면 마치 할 일을 다 못할 것처럼 버리기를 두려워한다. 아주 오래전에 쓴 메모장도 보관해 두는데, 때로는 내용이 야수파의 그림처럼 일그러져 있어서 모호하기 이를 데 없다. 무슨 일과 관련된 것인지 생각이 나지 않아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날림으로 메모를 덧붙인다. '나중에 다시 볼 것'
— 영양제 챙겨 먹기
— 이발하기
— 모임 톡방 오픈
— 발제문 쓰기
— 가족들에게 전화하기
— 명절에는 집에 가? 열차표는?
— 설국 다시 읽기
— 보림이 선물?
— 메모지 다시 들춰보기
— 운동화 사기, 나이키나 뉴발란스
난 분명히 괜찮다. 마음속에서 늘 하고 싶었던 걸 하면서 에너지가 생겼다. 이 즐거움을 감당하지 못해 허덕일 뿐이다. 스무 살부터 사무실에서 붙박여서 불행하다고 믿었던 내가 제대로 전환점을 맞았다. 난생처음으로 정확히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 있다. 난 더 이상 일요일 저녁만 되면 장거리 운전할 생각에 히스테릭해져서는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다. 하기 싫은 보고서를 연달아 결재받느라고 저녁을 날리지 않아도 된다. 카페가 영업시간이 끝날 때까지 원고를 써내느라 골머리를 썩이지 않아도 된다. 난 늘 굶주렸던 글감과 새로운 모임 기획, 왁자한 대화에 둘러싸여 모임에서 시간을 보낸다. 난 매주 독서와 글로 날 주도면밀하게 정비한다.
난 커뮤니티를 시작한다고 삶이 달라지게 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난 내 삶이 빛을 잃지 않게 하겠다고, 살면서 놀라운 일들이 계속 일어나게 하겠다고 여겼다. “우리 여행도 많이 하고, 난 여유롭게 글을 쓰겠지” 난 그런 척했고, 그래서 분투했다. 하지만 삶은 다시 비슷하게 돌아가고 있다. 정해진 일과에 맞춰 척척 일을 처리한다. 가끔 짝궁이 내게 “무슨 생각해?”라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난 할 일을 생각하고 있으니까.
나는 일과의 천재다. 내 일과를 긍정할 수 있어 기쁘다. 순수한 기쁨이라고 거짓말은 못하겠다. 지난 1년 독서와 글쓰기를 병행하는 시간의 축적이 노트북에 쌓여간다. 사실 좀 불안하기도 하다. 이게 다 뭔가 싶다. 빨리 어딘가에 취직해야 하나 싶기도 하다. 거리에는 임대와 권리금 없음을 써붙인 건물이 텅텅 비어있다. 그럴 때마다 늦은 밤 스탠드를 켜두고 일과를 잘 해내면 다 잘될 거라는 정체 모를 기도를 한다. 책을 외면서 염불을 왼다. 좋은 책을 고르고 잘 읽고 발제를 기똥차게 뽑아서 만면에 미소를 띤 채 모임을 진행하고 나면 다 나아질 것이라는 주술이다. 난 지치지 않을 자신은 있다. 아무튼 일과를 잘 지키고 서면 괜찮아질 것이다. 그래서 이 글 제목은 아무튼 일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