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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트롱 Apr 04. 2019

영화 <아틱> 리뷰 - 온전히 이미지로만 전달하는 영화

말 많은 영화는 싫은 사람들에게 추천합니다

*브런치 무비패스...로 본 건 아니지만 덕분에 관람했습니다


대사 많은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영화의 주제를 대사로 주저리주저리 떠벌리는 감독은 하수다. 대개 대사를 멋들어지게 한참 늘어놓는 이유는 그런 방식이 쓰기 편하기 때문이다. 나도 알량하게나마 중단편 시나리오 몇 편 써봐서 안다. 누구식 논리 아니냐고? 대통령급 논리라고 하자.


좋은 감독은 ‘영화 문법’을 잘 활용한다. 예를 들어 ‘나 어떡해? 이제 미래가 없어.. 난 끝났어!’라고 배우가 대사를 직접 읊게 하기 보다는, 천천히 어둠 속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을 약간 흔들리는 카메라 워크로 연출할 수 있다. 이런 고민이 영화 전체에 풍성하게 담겨 있는 영화들이 있다. 대개 그런 영화들이 ‘좋은 영화’라고 인정을 받는다. 나 역시 대사를 최소한으로 치면서도 미장센과 카메라 연출을 잘 활용해 하나의 선명한 아우라(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영화를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고, 실제로 좋아한다.

가령 등장인물이 내적 갈등을 겪는다면 파도치는 바다를 향해 걸어가는 모습을 흔들리는 카메라가 따라가며 표현할 수 있겠다 / 출처 영화 <본투비블루> 캡처

영화 <아틱>에는 대사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일단 마음에 들었다. 대사가 있는 부분은 영화 전체에서 5%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플롯 자체는 지극히 단순하다. 평범한 재난 영화와 다르지 않다. 주인공이 사고로 재난을 당하고, 살아남기 위해 발악하고, 자연의 무시무시한 공격이 한 번 더 이어지고, 그에 주인공은 모든 것을 다 잃으면서도 악을 쓰며 발걸음을 옮긴다.


이토록 뻔한 내용이지만 이 영화는 특별하게 다가온다. 그런 상황의 묘사를 대사 하나 없이 배우의 연기와 영상미, 그가 처한 상황 연출 그 자체로만 표현해 내기 때문이다. 쉼없이 떠벌이며 억지로 살아남는 ‘헐리우드식 재난’이 아닌 ‘진짜 재난’이란 이런 것이며, 진정한 ‘북극에서 살아남기’란 무엇인지를 묘사해낸다. 1인극이나 다름 없기에 배우 역량도 무척 중요한데, 이 무게는 매즈 미켈슨이라는 대배우가 감당했다. 그가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탁월한 연기력은 <레버넌트 : 죽음에서 돌아온 자>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선보인 1인 생존 연기만큼이나 흡입력이 강했다. 당시 디카프리오는 이 연기로 2016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여러모로 <레버넌트 : 죽음에서 돌아온 자>가 많이 연상되는 영화였다

<아틱>이 주는 메세지는 직관적이고 강렬하다. ‘사람이 먼저’다. 오버가드(매즈 미켈슨)가 기꺼이 멀고 험한 순례길에 나서게 된 계기는 그보다 더 위급한 상황에 처한 사람(이름 없는 여자, 마리아 델마 스마라도티르)을 살리기 위해서다. 혼자라면 보다 쉽게 목표지(베이스)에 도착할 수 있지만 부상자를 살리기 위해 족히 5배는 길게 돌아가는 험난한 길을 택한다. 말하자면 그는 ‘살리기 위해 살아남으려 하는 존재’다. 영화는 오버가드가 길을 나서기까지 이렇게 고민하고 결정하는 과정을 대사 하나 없이 설명해 낸다.


사람이 사람을 구한다는 숭고한 가치는 무엇보다 귀한 것이다. 남을 희생시키고 나 혼자 살아봐야 그 삶을 오롯이 견뎌낼 수 있을까? 모두가 이를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지만, 막상 위급한 상황에 처하면 어쩔 수 없이 자기 안위를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게 인간이다. 오버가드 역시 딱 한 번, 더이상 가망이 없어 보이는 여자를 포기하고 홀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러나 첫 발을 떼는 그 순간 오버가드는 천벌과 같은 죽음의 위기에 맞닥뜨린다. 겨우 살아나 다시 돌아온 그는 자신이 포기하려던 여자가 여전히 살아있음을 발견한다. 제 스스로의 알량한 판단으로 상대의 죽음을 예단하고 생명을 유기하는 책임은 얼마나 무거운 것인가? 그 죄책감은 무엇으로 갚을 수 있단 말인가? 오버가드는 여자를 끌어 안고 “죄송해요...”만 되뇔 수 있었을 뿐이다.

성공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끝없이 바위를 날카로운 산 정상에 올려 놓으려는 시시포스처럼, 오버가드는 이대로는 둘 모두 탈진해 쓰러질 수 밖에 없음을 알면서도 도달하지 못할 길을 걷고 또 걷는다. 그가 걸을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의 생존을 우선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의 바램은 ‘공생’이며 무슨 일이 있어도 나와 같은 ‘사람’(그녀는 동양인 혼혈로 보인다. 헬기 사고로 사망한 그녀의 남편은 중국인이다. 백인도 흑인도 아닌 동양인을 선택한 것에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인다.


‘사람이 먼저’라는 주제는 여느 재난 영화와 궤를 같이 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아틱>은 이를 확연히 다른 방식으로 보여준다. 일반적인 재난 영화에서는 생명을 구원하려는 행위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박감으로 표현한다. 반면 영화 <아틱>에서는 스릴넘치거나 긴박한 장면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이들의 생존 행위를 영화 전체 러닝타임(98분)을 따라가는 아주 긴 호흡으로, 오버가드의 지난한 고행을 따라가며 보여준다. 부상자를 들 것에 싣고, 끌며, 한 걸음 한 걸음 힘든 발걸음을 내딛는 오버가드의 모습은 흡사 십자가를 등에 쥐고 처형의 산을 오르는 예수를 보는 듯한 착시를 일으킨다. 새하얀 눈 속을 피와 같은 붉은 색 파카를 입고 이동하는 모습은 사뭇 숭고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 숭고함이 막연히 눈보라를 뚫으며 눈길을 걸어나가는 모습이 전부인 영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영화 전체를 통틀어 카타르시스는 딱 한 순간 존재한다. 영화가 끝나는 바로 그 순간이다. 한 번 동료를 포기했던 오버가드는 두 번째 위기에서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동료를 살리고, 또 살아남기 위해, 북극에서 생명과도 같은 자신의 붉은 파카까지 불에 태우며 최선을 다한다. 그는 멀리 보이는 헬기를 향해 “내가 여기에 있다”가 아니라 “그녀가 여기에 있다!”라고 외친다. 최선을 다한 그는 떠나가는 헬기를 바라보며 조용히 그녀를 품에 안고 죽음을 받아들인다. 그러면서도 그가 뱉는 말은 “괜찮아요. 우리 함께 있잖아”다. 끝까지 공생을 포기하지 않은 그에게 신은 가혹하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구원받는다. 떠난 줄 알았던 헬기가 그들에게 도착하고 영화는 그 순간 막을 내린다.




p.s) 아이슬란드 영화다. 그래서 매즈 미켈슨이 혼잣말을 할 때는 노르딕어로, 여자에게 말을 걸 때는 영어로 말한다


p.s2) 러닝타임이 98분으로 짧은 편이다. 더 길었으면 자칫 지루했을텐데 감상하기 딱 맞는 시간인 듯



★★★★(4.0 /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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