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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 Nov 02. 2021

여자 풋살 도전기 1

첫 번째 클래스: 일단 그냥 하기

나는 스포츠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구기종목에 딱히 관심이 없으니 전국민이 열광하는 축구 경기도 챙겨본 적이 없다. 

그나마 챙겨 본 경기가 20년 전 2002 월드컵이 마지막이라면 말 다 했다.

그러던 내가 어쩌다 보게 된 것이 SBS의 '골 때리는 그녀들'이라는 프로그램이었고,

이 프로그램 하나가 구기 종목에 관한 그동안의 생각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사실 나는 걱정도 많고, 플랜 B, C, D... 따위를 세우는 사람이라

어떤 일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단순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걸 스물 중반즈음에 깨달았다.

그래서 풋살 학원에 등록하기까지 딱 이틀만 고민하기로 마음 먹었다.


내 수업은 저녁 8시에 시작이었는데 

5시쯤 문의 전화를 하고는, 밥 먹는 내내 체할 것 같은 긴장감을 느꼈다.

긴장감의 근원이 무엇일까 계속 생각했다.


나는 경쟁을 싫어한다.

승자가 있으면 패자가 있어야 하고, 1등이 있으면 2등이 있어야 하는 게 싫었다.

차라리 내가 지는 것이 낫지, 누군가를 아래에 세워두고 올라가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풋살은 경쟁 게임인데 누군가가 이기면 지는 팀이 있다.

경쟁을 할 생각을 하니 아까 먹은 밥이 올라올 것 같았다.

아빠가 옆에서 '용기 내서 도전 해봐. 젊을 때 안 해보면 언제 하겠니.'라는 말씀을 하신다.




어찌됐건 가겠다고 말은 해놨으니 가긴 해야 한다.

도살장에 자발적으로 나서는 소마냥 깜깜한 시골길을 헤쳐 가면서

'내가 핸들을 안 잡았으면 벌써 수백번 내 뺨을 쳤을 텐데 정말 다행이다' 하다 보니 풋살 학원에 도착했다.


풋살 학원에는 나처럼 왕초보 여성들이 열 두 명 모여 계셨다.

20대 초반부터 50대 초반의 언니들이 계셨고 다수가 30대이여서 무척 반가웠다.

간단히 나이와 이름으로 자기 소개를 하고 (음 한국인)

몸풀기를 했다.


준비 스트레칭을 하고, 웜업을 위해 사다리 스텝 연습을 했다.

코치님이 계속 잔발을 뛰면서 몸에 열을 올려야 한다고 하셨다.

큰일났다. 

시키는 대로 잔발만 했을 뿐인데 벌써 체력이 바닥났다.

약간의 몸치 기질이 있어 인사이드, 아웃사이드 드리블을 할 때는 무슨....

아이돌 댄스 음악을 틀어주셔서 다행이지 김흥국의 호랑나비가 딱 어울렸을 법한 몸짓이었다.

접시 콘도 피해서 가야 하는데 굳이굳이 꼭꼭 즈려 밟는 나.


처음 드리블하는 느낌이 너무 신기하고 생소했다.

아, 이렇게 공을 몰고 가는 거구나. 

뭔가 연습을 하면 감이 좀 올 것 같은데 여전히 호랑나비다.

못 하니까 투지가 불탄다. 내일부터 강당에서 드리블 맹연습해야지. (아님)


그렇게 드리블과 패스 연습을 합친 미니 게임을 하고 나니까 1시간이 다 갔다.

고깔 세 개를 먼저 맞추면 이기는 게임이었는데 6명이서 세 네 바퀴를 돌아도 못 맞혔다.

어떤 언니가 고깔을 맞히고 기뻐하는 우리를 보면서,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기쁘냐고 함박 웃음을 지으셨다.

고깔 맞히고 소리지르는 날 보면서 우리 반 아홉살 꼬마들의 마음이 이런 거였구나,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마지막 30분은 경기를 했다.

한 팀이 6명이니 다섯이 뛰고 한 명씩 교체를 했다.

어쨌든 나름대로 팀이 꾸려졌으니 화이팅도 외쳐보고,

팀원들이 공격수, 수비수 등을 나누재서 축알못인 나는 어버버하고 있으니

왕언니가 우리 둘이 공격수 하자고 제안하셨다.


경기가 시작돼고, 체력 안배를 위해 5분 뛰고 3분 쉬고가 여러 번 반복.

공격수도 해보고 수비수도 해보고 골키퍼도 해보니 어떤 게 나랑 잘 맞는 것 같은지 감이 온다.

나는 체력이 쓰레기라 공격 5분 하고나니 거의 토가 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 우리 골때녀 언니들은 강철 체력이었구나...

언니들이 '답답하면 니들이 뛰시든지' 해도 난 할 말이 없다.

수비 역을 하니 그래도 결정적인 순간에 몇 번 도움이 된다. 


참 신기했던 게 풋살을 하는 5분 동안 정말 아무 생각이 안 난다.

5분 간은 공에만 집중을 하게 되는데 나도 모르게 달려가고 있고, 소리를 지르고 있다.

아까 배운 인사이드 패스는 한 번도 써먹지 못했지만

그래도 공놀이 비슷한 것을 처음 해보니 또 재미있다.


10살 때까지는 남자 애들이랑 축구를 했던 것 같은데

그리고 교사가 되고도 우리 반 애들이랑 몇 번 축구를 해보았던 것 같은데

꼭 그 때로 돌아가

별 거 아닌 것에 웃음 터지고 환호성 지르게 되는 나로 돌아간 것 같았다.

우르르 몰려 가서 냅다 발로 때리는 좀비 축구여도 이 상황 자체가 웃겨서 실성한 사람처럼 웃고 있었다.

어이 없지 공 차면서 히힉거리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니.




나의 목표는 3개월만 꾹 참고 다녀보는 것이다.

아까까지는 재밌어서 바로 그 자리에서 강습료를 지불했는데

다음주에 갈 생각을 하니 또 아득해지네. 

3개월, 딱 열 두 번만 해보자.


이보다 더한 경쟁도 많은데 이렇게 건전한 경쟁도 이겨내지 못하면

더 강한 사람이 될 수 없을 것만 같은 느낌.


그리고 두 번째 목표.

애들이 '공 좀 던져 주세요.' 할 때 이상한 곳으로 차서 분위기 싸하게 만들지 말자.


마지막 목표.

지금보다 애들이랑 공으로 더 많이 놀아주자.

특히 여자 어린이들. 

여자 어린이들이 운동장으로 나오게 하자.

운동장에서 뛰는 여자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어서

여자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축구하는 게 어색한 일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자.


못 뛰어도 되지 않나?

어차피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남자 애들 열 명 중 반은 우르르 몰려 다니며 아까 나처럼 공 차고 있던데. ㅠㅠ

기회를 주지 않아서 못 하는 여자 애들이 많을 거다.

그냥 거기에 여자 아이가 서 있는 게 어색하니까 하지 않았던 애들이 많을 거다.

왜냐면 내가 그런 여자 아이였으니까 잘 안다.


내일은 학교에 가서 옆반 선생님에게 같이 합반 축구하자고 해봐야겠다.



첫번째 풋살 수업에서 느낀 점.


1. 풋살을 해서 체력이 좋아지는 게 아니라 풋살을 해야 하니까 체력을 올리게 되는 거구나.

2. 안경......이 놈의 안경에 자꾸 김이 껴서 앞이 안 보인다.

3. 아 나 기초 체력 쓰레기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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