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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나래 Apr 30. 2024

공항에 왔는데 여권을 두고 왔습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을까


공항에 탑승수속을 하러 왔는데 여권을 두고 왔다.

그 일이 나에게도 일어나고 말았다.


근로자의 날을 하루 앞둔 4월 30일 화요일. 며칠 휴가를 붙여서 베트남에 가기로 했다. 좀 더 안전한 스케줄로는 5월 1일에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시간을 아껴서 휴가를 즐기고 싶었던 탓에 조금 무리지만 일을 마치고 바로 비행기를 타기로 했다. 하루 종일 회의에 상세 요건들을 확인하는 슬랙이 바쁘게 울렸고, 그 와중에 개인적으로 처리할 일들도 있었다. 전혀 리드타임이 없었다. 일을 마치고 부리나케 마지막 남은 짐을 캐리어에 쑤셔 넣고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철도 타고 한참을 가다가 인천공항에 도착한 그때, 이제 내려야 하는데. 깨달았다.

아.. 여권. 놓고 왔다.


여권.. 꼭 챙깁시다

솔직히 여행을 철저하게 준비하는 성격이 아닌 탓에..

어떤 사람은 계획을 철저하게 세우고 며칠 전부터 캐리어를 싸지만 나는 그냥 가고 싶으면 갑자기 휴가를 계획하고 대충 짐 챙겨서 떠나는 편이다. 이번 여행도 비행기 티켓팅과 숙소만 잡아놓고 계획도 없다. 캐리어 챙기기도 그냥 귀찮아서 수영복만 대충 챙기면 된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뭐 빠트려도 인생 대세에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사면되기 때문이다.


뭘 좀 빠트린다고 인생 대세에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살아도 지금까지 별문제 없이 살아졌던 탓에 계속 이렇게 살고 있었는데, 그런데 결국 사고를 친 것이다. 아무리 계획이 없어도 한국 출입국 하는 항공권이랑 처음 도착하는 도시 숙소는 미리 예약한다라는 원칙은 있었고, 다른 건 안 챙겨도 여권, 핸드폰, 카드만 챙기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원칙대로 한 번도 여권을 두고 온 적은 없었는데 오늘 결국 그 일이 일어났다.


'이것'만 있으면 된다에서 '이것'을 놓고 오면 어떨까. 생각해 보니 핸드폰, 카드도 없어도 된다. 어차피 친구와 같이 가므로 핸드폰 없으면.. 디지털 디톡스를 하면 되고. 그 와중에 휴가 중에 꼭 들어가야 하는 회의가 있어서 노트북을 가져가므로 사실 노트북으로 뭐 봐도 되고. 카드 없는 것도 친구가 결제하고 나중에 정산하면 되는데. 음, 그렇지만 여권이 없는 것은.. 출입국이 안 되므로.. 내가 전용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해결책을 찾으려고 했지만

내가 예약한 항공사는 목적지까지 비행기를 하루에 한 편만 운행한다. 그래서 항공사 카운터에 문의했더니 오늘은 늦었고 내일 타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여행사를 통해 예약했으므로 항공사는 항공편을 변경할 권한은 없고 취소만 할 수 있다고 했다. 이미 랜딩까지 너무 촉박한 시간이었으므로 일단 항공편을 취소하기로 했다. 그리고 스카이스캐너를 돌려서 오늘 출발하는 다른 항공편이 있는지 조회했다. 시간이 맞으면 즉석에서 예약하고, 공항에서 제공하는 긴급 단수여권 발급을 받을 심산이었다.


그런데 조회해 보니 애초에 비행 편이 그리 많은 지역이 아닌지라 가능한 한국 항공사 비행기는 이미 남은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남은 건 진짜 애매한 시간대의 비엣젯 밖에 없었는데 같이 가기로 한 친구가 비엣젯이 연착 등 이슈도 많고 너무 좁다는 의견도 있다고 그냥 한국 항공사 타라고 말렸다.


게다가 단수여권을 받았을 때 문제점도 있었다. 입국하는 나라에서 별로 안 좋아할 것이기 때문에 출입국 할 때 잡아두고 절차가 길어질 수도 있고, 작년 12월에 갓 재발급한 내 기존 여권을 정지시켜야만 했다. 여행에서 돌아와서 다시 복수여권 발급받으러 구청까지 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아무래도 종합적으로 고려해 봤을 때 그냥 무리하지 말고 내일 출발하는 비행기를 다시 예약해서 기존 여권 들고 정상 출국하는 게 나았다.



살면서 정말 스트레스받는 상황은 피하고 싶은 상황에 처했으면서,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전전긍긍하고 희망고문 당했는데 결국 해결이 안 됐을 때인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이번 이벤트는 그 정도까지 스트레스받는 것은 아니었다. 여권을 두고 왔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리드타임 전혀 없이 가능한 가장 빠른 시간에 나온 터라 공항에 겨우 1시간 반 전에 도착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별도리가 없었다. 여러 시도를 해보긴 했지만 안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체념하고 발길을 돌렸다.


여권이 없을 때 vs 전달받은 후


이 와중에 너무 따뜻하신 긴급여권 발급 직원분

그분은 하루 종일 하는 일이 나 같은 사람 보는 일일 것이다. 민희진 스타일로 말해서 '아.. ㅈ 됐다'라는 표정으로 와서 '어디 뭐 방법이 없나요, 이건 안 되나요 엉엉' 이러고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을 하루 종일 볼 것이다.


그래서 터득한 사회생활 노하우이신지, 원래 따뜻한 성정을 가진 것인지, 내가 긴급 여권 발급되냐고 말 꺼냈을 때부터 폭풍 공감을 시전 하셨다. 놓고 오셨냐, 여행 가시냐.  너무 놀라셨겠다. 이러 이렇게 할 수는 있다. 비행기가 몇 시냐. 아 새로 발권할 거냐. 그런데 이게 발급에 한 시간이 걸려서, 시간이 그렇게 촉박하면 어려우실 수 있다. 내가 알겠다고 내일 갈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돌아서려고 하자 도움 못 드려서 죄송하다까지. 죄송하긴 뭐가 죄송하나요.. 내 멍청 비용이지..


아 그리고 혹시 지방에서 오셔서 가져오기가 어려우시냐도 물었다. 오, 생각해 보니 나는 서울 사니까 화나지만 다시 공항철도 타고 돌아가면 되는 수준인데, 지방에서 왔는데 여권이 없으면.. 진짜 화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지방에 가서 여권 가져오느니 단수여권 받고 공항 옆 호텔에서 자겠다 싶다. 그래, 내 생황이 그나마 최악은 아니랄까. 그냥 시트콤 찍었다고 생각해야지 뭐. 돈과 시간을 좀 날린 시트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을까

사실 뭔가 놓고 왔을 때 돈을 멍청하게 쓰는 게 아까울 뿐이지 다 돈 주고 살 수는 있다. 가령 핸드폰도 정 안 되면 돈 주고 살 수 있고, 환전을 유리하게 못하는 건 아깝지만 그래도 환전할 수 있지 않나. 하지만 여권은.. 그냥 별 수 없어서 다음날 비행기를 다시 예약했다. 그리고 하루에 다니는 비행기가 몇 대 없어서 그냥 꼬박 하루를 날렸다.


이 이야기를 친구한테 전화해서 와, 나 이런 일이 있었다, 그냥 뭐 놓고 와도 사면되는데 돈으로 못 사는 게 여권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친구가 깔깔 웃으면서 '그래도 내일 다시 예약했으면 돈으로 해결한 거네~'라고 말했다. 나는 좀 억울했다. 이게 해결이라고 볼 수 있을까? 내 짧은 휴가 중에서 하루를 꼬박 날리는데? 그래서 깨달았다 아, 돈으로 못 사는 것은 지나간 시간이구나.


여권도 사실 돈으로 못 산다고 보기에는 공항에서 단수 여권이라도 받을 수 있고, 결국 항공권이 문제라면 돈 주고 다른 것 살 수 있다. 비현실적이지만 전용기가 있었으면 여권 없어도 어떻게 갔을 것이다. 그런데 이미 지나가 버린 내 시간은 살 수가 없군.


같이 여행 가기로 한 친구는 먼저 여행지로 보냈다. 환불 얼마를 해줄지도 모르고(해주긴 하겠지..? 제발~) 나 때문에 하루를 날릴 필요 없이 그 친구라도 먼저 가는 게 맞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약간 진정한 다음에 깔깔 웃었다. 아 우리 진짜 다이내믹하다. 예전에 너 휴가 따라서 일본 갔는데 너는 갑자기 비즈니스 타고 나는 이코노미 타는 상황에 이어서 다시 한번 레전드 갱신했다며.. 나랑 같이 갈 줄 알았는데 졸지에 혼자 비행기 타고 혼자 풀빌라를 즐기고 있을 친구에게 때로는 고요한 하루를 보내는 것도 힐링이고 오히려 좋다고 심심한 위로를 건넨다.


흘러간 시간이 아깝다지만 지나고 나면 겨우 휴가 하루 잃은 것이 아깝기라도 할까. 지금 이 에피소드가 재밌어서 하루 이상 회자하리라. 지나면 다 추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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