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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나래 Apr 07. 2019

아랍인 핫플 호텔에 가버렸다

여기는 방콕인가, 두바이인가?


내 기준에서 세상 사람들은 두 가지로 나뉜다. 관광지부터 맛집 투어까지 철저하게 계획된 여행 일정을 엑셀 파일에 정리하는 사람대충 도착만 한 다음에 '뭐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다니는 사람. 나는 명백히 후자의 인간이다. 나는 여행 계획을 세우는 게 귀찮다.


철저히 조사해 일정을 정리해 놓으면 분명히 장점이 있다. 한정된 시간 내에 더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할 수 있으며 1일 투어나 숙박, 레스토랑 예약의 측면에서 닥쳐서 뭔가를 결정하는 것보다 더 많은 선택지가 있다. 하지만 나 같은 '뭐 어떻게든 되겠지'형의 인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이 귀찮은 것이다. 내 기준에서는 업무 상 프로젝트 매니징을 하는 것만으로도 나에게 내재된 계획성을 모두 소진하는 느낌으로, 쉬러 가는 여행에서까지 뭔가를 열심히 조사하고 수행할 열정이 없다.

 

준비를 안 해도 방콕 음식은 사실 기본적으로 맛있다.


사실 이런 나도 한 가지 열정이 불타는 것이 있긴 있는데 바로 항공권 구매다. 언제부터 생긴 묘한 부심인지 모르겠는데 항공권만큼은 누구보다 싸게 산다는 자부심 아닌 자부심이 있어서 그거 하나만큼은 열심히 서치를 하곤 한다. 시가보다 비싸다고 생각되면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구매를 하지 않고 더 싼 티켓을 찾아 여행 날짜나 목적지를 바꿔 버릴 정도다. 하지만 그 열정은 항공권 구입 즉시 사그라들어 여행 날짜가 도래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곤 한다.


그래서 여행 날짜가 임박하게 되면 갑자기 발 등에 불똥이 떨어진다. 다른 건 다 안 해도 잘 데는 있어야 하니까 호텔은 예약해야 하지 않겠는가. 재작년에 미국 서부 여행을 갔을 때는 샌프란시스코 왕복 항공권을 대한항공 80만 원에 알뜰하게 끊고 뿌듯해했는데 그 뒤 아무것도 안 하고 미루고 미루다가 호텔은 출발 전 날에야 예약했다. 가까운 일본 가는 것도 아니고 미국을 그렇게 막 결정하냐며 친구들이 혀를 내둘렀다.



무계획 여행자가 방콕 호텔을 예약하면

이번 방콕 여행도 그런 성향이 문제였다. 사실 이번에는 좀 더 신경을 썼다. 나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친구와 같이 가는 것인 데다가 호텔 가성비가 좋은 방콕이기에 평소에 쉽게 못 가보는 좋은 호텔에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방콕이 호텔 가성비가 좋다고는 해도 5박 6일 내내 5성급 호텔에 머무는 것은 지출이 크다. 그래서 방콕 중심가에 위치한 가성비 호텔 3박, 리버사이드에 위치한 5성급 리조트 호텔 2박을 하기로 '계획성 있게' 정리했다.


아난타라 리조트. 이 호텔 갈 꿈에만 부풀어 있었다.


문제는 친구와 나 둘 다 럭셔리 호텔에 갈 꿈에 부풀어 그쪽만 열심히 찾아봤다는 것이다. 멋진 풀장, 근사한 바, 최고급 서비스와 안락한 객실. 여기서 사진 찍으면 근사해 보이겠지? 사진 잘 나와야 하는데 무슨 옷 가져가지? 꿈에 부풀다 보니 정작 3박을 머무를 가성비 호텔에는 관심이 가지 않았다. 사실 아난타라 리조트를 보고 난 다음에 뭐가 눈에 차겠는가. 이래서 눈을 쉽게 높이면 안 된다. 결국 가성비 호텔 중에는 눈에 차는 데가 없어서 결정을 미루고 미루다가 이제는 정말 결정해야 할 시점이 다가왔다. 논의 끝에 친구와 나는 방콕 중심가 스쿰빗에 위치한 욕조가 있는 트윈 베드 룸을 찾자고 합의를 보았다.


조건이 결정되었으니 필터링만 하면 된다. 호텔 예약 앱 필터에서 욕조와 트윈 베드를 쓱쓱 추가해 적당한 가격에 모든 조건을 만족하는 호텔을 하나 찾았다. 대충 살펴보니 사진 상 깔끔하고 별점도 나쁘지 않았다. 리뷰어들의 국적이 유달리 아랍 쪽이 많은 것 같아서 약간 찝찝한 마음은 있었지만 더 나은 조건을 찾지 못해 (사실 더 찾기 귀찮았다) 그 호텔로 예약했다.



혼돈의 호텔 도착기

친구는 다른 나라 발령 중이었기에 우리는 따로 출발해 방콕 호텔에서 만나기로 했다. 항공 스케줄을 무리하게 잡은 터라 출발 당일, 나는 정말 바빴다. 퇴근 후 바로 서울역 출발 직통 열차를 타고 공항에 가야 했다. 시간이 너무 빡빡했기에 아침 일찍 서울역 도심공항에 미리 체크인을 하고 캐리어를 맡겨 놓았다. 그리고 퇴근 시간 땡 치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퇴근 해 서울역으로 갔다. 열차를 놓치면 비행기도 놓치는 것이었다. 다행히 비행기는 탔고 무사히 방콕에 도착했다.


하지만 너무 하루 내내 정신이 없어 얼빠진 상태였는지 도착할 때부터 에피소드가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환전하는 것을 잊어버린 것이다. 한국에서 달러로 환전을 하긴 했는데 공항에 내려서 달러를 다시 바트로 바꾸는 것을 잊고 그냥 택시를 타버렸다. 처음에는 환전 안 한 것도 잊어버리고 택시 기사에게 달러를 주려다가 나중에야 내가 현지 통화가 없음을 깨달았다. 말도 잘 안 통하던 그 택시 기사는 늦은 밤 갑자기 달러를 내미는 이 외국인이 얼마나 황당했을까.. 현지 통화는 없고 핸드폰은 중간에 꺼져버리고 아찔한 순간이었는데 결국 어떻게 잘 해결하긴 했다고 한다. 살아보니까 다 어떻게든 되긴 되더라. 어떻게든 다 된다는 걸 아니까 점점 여행 갈 때 준비를 안 해간다.


혼돈 끝에 드디어 입성한 안락한 나의 호텔. 하지만 도착하자마자 느꼈다. 음..? 이거 좀 이상한데..?

로비에서 들리는 이국적인 음악. 의자에 앉아 있는 눈 빼고 온 몸을 다 가린 니캅을 착용한 여성들. 여기는 방콕인데 이 분위기는 분명 태국의 색채는 아니다. 왜 우리는 방콕에서 아랍인 핫플 호텔에 온 것일까.



방콕의 우사단로, 아랍인 핫플 호텔에 가다

유럽에서 한인 민박을 갈 때면 이런 생각을 하곤 했었다. 외국인들도 자기네들끼리 모이는 장소가 있을까? 분명 걔네들도 있긴 있을 거야. 그렇다. 외국에서 유달리 한국인에게 핫한 호텔, 맛집이 있는 것처럼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우리 빼고 숙박객 대부분이 아랍계인 것 같은 이 호텔에서 우리는 마치 멋모르고 한인 민박에 온 외국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직원들은 태국어와 영어, 아랍어를 했다. 방 안에 있는 TV에서는 태국 채널과 아랍 채널이 나왔다. 조식을 먹으러 갔다. 중동식 조식이었다. 하머스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랍 에미레이트로 여행을 온 것도 아닌데 아침 식사로 먹게될 거라고 생각을 했을까? 뷔페에 차려진 음식 앞에서 입맛이 돌지 않아 뭘 먹어야 할지 방황했다. 인천 공항에서 마지막으로 먹고 온 음식이 하필 케밥이었던 게 생각났다. 이럴 줄 알았으면 김치찌개를 먹고 올걸.. 후회막심했다. 레스토랑에 있는 TV에서 흘러나오는 아부다비 TV 채널에서는 아나운서가 아랍 에미레이트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최대한 유럽식 조식에 가까운 빵과 소시지, 구운 채소를 골라 먹고 길거리에 나갔다. 나는 분명 방콕에 왔는데.. 여기는 중동? 어째 길거리를 걷는 사람이 태국인 반 아랍인 반인 것 같고 거리에는 아랍 음식점이 즐비했다. 그렇다. 여기는 아랍 스트리트였다.


그러니까 이태원에 있는 호텔을 잡았는데 알고 보니 호텔이 아랍계가 많은 우사단로 한복판에 위치해 있고 나 빼고 나머지 숙박객들이 전부 아랍인인 것과 마찬가지였다. 호텔을 잘못 예약한 것 같다는 낭패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조식 3끼 내내 빵 쪼가리만 먹어야 하는 건지 우울했다. 사진으로 보여주고 싶은데, 이 포스팅을 할지는 모르고 호텔이고 거리고 비주얼이 안 나온다고 생각해서 찍지도 않았다.


내가 기대한 건 이런 태국 감성인데..


나, 의외로 적응 잘하는 타입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우리는 다시 조식을 먹으러 내려갔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전날에는 영 입맛이 안 돌아 몇 개 안 되는 메뉴 중에 빵, 계란, 소시지 같은 것만 골라 먹었는데 오늘은 하머스고 아랍식 커리고 뭔가 더 괜찮아 보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접시에 아랍 음식을 더 담았다. 맛있었다. 이것저것 야무지게 비우고 커피까지 여유롭게 마셨다. 친구에게 물었다.


"뭔가 어제보다 맛있는 거 같아. 음식이 바뀐 건가?"

"아니. 똑같아. 니가 적응한 듯."


그렇다. 나는 의외로 적응 잘하는 타입. 하루 만에 이 호텔의 아랍 분위기에 적응한 것이다.

어제는 투덜 댔는데 적응하고 보니 역시 호텔이 가성비가 좋았다. 조식 뷔페 운영 시간도 여유롭고 방도 사진 그대로였고 청소 상태도 좋고 욕조도 컸다. 스쿰빗 한 복판이어서 BTS(태국 지상철. 아이돌 그룹 BTS와 아무 관계도 없다) 역도 가까웠고 그 마저도 컨시어지가 툭툭이로 태워다 줬다. 택시도 잘 잡아줬다. 로비에서 들리던 이국적인 음악은.. 언제 그런 음악이 들렸나? 신경을 안 쓰니 들리지도 않았다. 덕분에 3박 4일 간 편안하게 잘 지냈다.



그러니까 빨강머리 앤의 명언처럼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은 의외로 정말 멋진 일이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니까. 생각대로만 됐으면 방콕에서 아랍인 핫플 호텔에 가지도 않았을 거고 조식으로 하머스를 먹을 일도, 환전을 안 해서 택시 기사한테 달러를 건네는 일도 없었겠지. 그럼 여행의 추억이 여럿 줄었을 거고 친구랑 맥주 마시며 그땐 그랬지 어이없어하며 평생 우려먹을 이야기도, 이 글을 쓸 소재도 안 나왔을 거다. 그러니까 가끔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이 내 인생을 더 풍부하고 재미있게 만들어 준다.



인생은 호텔 조식으로 크루아상도 먹었다가 커리도 먹었다가 하머스도 먹어보는 것

그러니까 뭔가가 계획대로 딱딱 맞아떨어져야만 한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생각해보면 나쁠 게 없기 때문이다. 비록 생각했던 유럽식이나 태국식 조식은 아니지만 그래도 호텔 조식이잖아. 나는 휴가를 왔고 여기는 방콕이고 하루 내내 시원한 창 맥주를 실컷 마실 수 있다. 그 외에 뭐가 중요할까? 약간의 시련쯤은 오히려 내 추억을 컬러풀하게 만들어 줄 뿐이다. 그러니 인생이 뜻대로 안 되어도 잠깐 슬퍼하고 말자. 의외로 괜찮은 것들이 앞날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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