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가고 싶어서 쓰는 베네치아 여행기
몇 년 전, 베네치아였다. 나는 혼자 두 달 간의 유럽 여행을 왔고 베네치아 최대 관광명소 산 마르코 광장을 마주 본 숙소 앞 거리를 산책하고 있었다. 그때 그 친구들이 말을 걸었다.
"안녕! 산책하는 중이야? 내 이름은 @@이고, 이 친구는 XX야. 난 베네치아 토박이고 지금은 런던에서 일을 하는데 여름이라 잠깐 집에 놀러 왔어. 우리 관광객들 많은 산 마르코 광장 말고, 현지인만 아는 곳에 갈 건데 같이 갈래?"
거절할 이유가 있었을까? 어차피 혼자 와서 심심했고, 현지인만 아는 비밀 장소가 궁금했고, 그 친구들은 잘 생겼었다.
흔쾌히 승낙하고 친구들을 따라서 수상버스를 탔다. 베네치아는 물의 도시. 작은 블록들이 끊임없이 다리로 이어지는데 GPS 조차도 제대로 위치를 못 잡기 때문에 낮에도 길을 잃기 쉬운 곳이다. 그런 도시에서 인적 하나 없는 동네를 처음 본 친구들만 따라서 같이 걸었다.
산 마르코 광장은 수상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나온다. 사실 비슷한 그림을 상상하고 따라 나온 터여서 걸어도 걸어도 나오지 않는 그 현지인 광장을 향한 여정이, 당황스러웠다. 수상버스에서 내려서 구불구불한 베네치아 거리를 몇 분을 걷자 아무리 정신을 바짝 차리려고 해도 길을 기억할 수가 없었다. 겁이 없는 편인데 겁이 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한 밤 중에 베네치아에서 모르는 사람을 따라나선 것 자체가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다. 관광지 빼고는 밤에 인적도 없고 외지인이 길 찾기는 정말 힘들다. 나쁜 사람들이었다면 거기서 그대로 사라져도 아무도 몰랐을 거다. 세월의 흐름만큼 겁이 많아진 지금이라면 그렇게 과감하게 따라갔을까 싶은데, 당시에는 어렸고 나는 겁이 없었다.
다행히 결과는 해피엔딩이었다. 친구들은 좋은 애들이었고 그 날의 외출은 정말 즐거웠다. 데려 간 광장은 현지 10대, 20대가 모이는 핫플레이스였다. 베네치아 현지 애들이 절대 다수인 것 같았고, 소문 듣고 온 유럽 애들이 조금 있었다. 광장에 사람이 꽉 차 있었는데, 아시아인은 나 하나뿐이었다. 산 마르코 광장에 가득 차 있는 관광객들을 생각하며 괜스레 뿌듯했다.
광장에서 더 많은 친구들을 소개받았다. 베네치아 토박이 남녀 여럿에 스위스에서 여행 온 두 명이었다. 모두 유쾌한 아이들이었고 극 외향형이었다. 우린 함께 마시고, 이야기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여자 애 하나는 10대 후반이었는데 아시아인 친구 사귄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도 이탈리아 10대 사귄 건 처음이야, 생각했다. 처음 해보는 유럽식 볼 키스에 당황했던 순간이 지금도 선명히 기억난다. 나라마다 키스를 하는 횟수가 달라서 이탈리아는 두 번이고, 스위스는 세 번이었다.
그때, 한 친구가 재밌는 제안을 했다. 베네치아 근처에는 포토스폿으로 유명한 부라노섬과 해수욕으로 유명한 리도섬이 있다. 내일 리도섬에 해수욕하러 같이 가자는 것이다.
친구는 베네치아 토박이였다. 차 대신 보트를 가지고 다닌다는 뜻이다. 자기 개인 보트가 있다며 내일 태워주겠다고 했다. 아, 정말 너무 가고 싶었다! 수년이 지났는데 지금 생각해도 아쉬울 지경이다. 언제 베네치아 현지인 보트를 나고 같이 해수욕하러 갈 수 있겠는가?
그런데 갈 수가 없었다. 내일 피렌체로 가는 기차가 예약되어 있어서 아침에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두 달 간의 여행에서 계획이 무슨 대수인지, 취소하고 다시 예약하면 되지 않냐 싶을 수 있다. 신용카드를 손에 쥔 지금이라면 망설임 없이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그렇지 못했다. 현실적으로 정말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대학생이었고 한 학기 휴학을 하고 컨설팅펌에서 밤낮없이 일을 했었다. 퇴근하면 대중교통이 끊겨 택시 타고 집에 가는 것이 일상이었다. (맞다. 야근은 시켜도 택시비는 칼 같이 줬으니 좋은 회사였다.) 그렇게 인턴 나부랭이로 몇 개월을 보내고 손에 쥔 돈들을 그야말로 영끌해서 유럽에 온 것이었다.
정해진 예약을 이제 와서 취소하면 위약금은 못 받을 것이고, 그러면 새로운 교통과 숙박을 예약해야 하는데 여유돈이 없었다. 나는 눈물을 머금고 제안을 거절해야 했다.
사실 내 MBTI 끝자리는 P로, 여행 갈 때 딱히 계획을 세우고 싶어 하는 타입은 아니다. 원하는 이상적인 여행은 그냥 그때그때 가고 싶은 곳 정하는 것에 가깝다. 하지만 교통은 미리 예약하느냐 여부로 가격 차이가 많이 났고, 그래서 한국에서 모든 예약을 마치고 온 상태였다. 그리고 그에 맞춰서 숙박 예약도 해버린 상태였다.
그렇다. 없던 계획성도 돈 앞에서는 생기고, 인생에 남을 즐거운 추억도 돈 없으면 못 만드는 거다. '돈이 중요한 게 아니다', '돈으로 모든 것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하는 말들도 많은데..
아니다, 돈은 중요하다. 좋은 집, 좋은 차, 뭐 있으면 좋지만 단지 그 때문은 아니다. 더 본질적인 이유 때문에 돈은 중요하다. 하고 싶은 것을 할 자유,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을 자유, 돈은 의사결정의 자유를 주기 때문에 중요하다.
광장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숙소 쪽으로 돌아왔다. 처음에 만났던 베네치아 토박이 친구 두 명과 함께였다. 무슨 이탈리어를 따라 해 보라고 시키길래 해줬더니 깔깔 아주 신나 했다. 뭐 보나 마나 욕이거나 야한 말이겠지. 유치했지만 좋아하길래 모르는 척 그냥 따라 해 줬다.
그러던 중 두 친구가 티격태격을 시작했다. 한 명이 다른 친구를 다리 위에서 칠흑 같은 밤바다 속으로 멀어 넣어버리려는 것이었다. 늦은 시간이라 꽤나 졸린 상태여서 허세겠지.. 저러다 말겠지.. 하는 마음으로 멀찍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웬걸, 진짜 바닷속으로 밀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순간 잠이 확 깼다. 이 시간에? 바다에? 지나다니는 사람도 한 명도 없는데? 내가 지금 살인 사건을 목격한 것일까?
놀라움도 잠시, 나머지 한 명도 상의를 탈의하고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둘은 어푸어푸 헤엄을 치다가 무사히 육지로 돌아왔다. 그리고 발랄하게 말했다.
"My friend! 저기 내 옷 좀 가져다줄 수 있어?"
벗어 놓은 옷을 주섬주섬 가져다주면서 생각했다. 아.. 베네치아 토박이들한테는 이게 놀이구나... 차 대신 보트를 가지고 다니질 않나, 밤바다에 사람을 밀어버리질 않나. 나는 낮에도 수영을 잘 못하는데. 환경에 따라 사람이 사는 모습이 정말 달라진다는 생각을 했다.
아는 만큼만 보이고 기억에 남는다는 것을 실감한다. 그 날의 추억이 인생을 돌이켜봤을 때 순위권 내에 들 즐거운 기억인데도 불구하고 친구들 이름이 영 기억나지 않기 때문이다. 제이콥, 브랜든, 안젤라, 제시카 같은 영미권 이름은 귀에 쏙 박히는데, 익숙하지 않은 언어의 이름은 쉽게 잊힌다. 뇌가 '어이, 무리야. 이런 것까지 저장할 공간은 없다고!' 외치는 것 같다.
가령 로마에서 만난 어떤 친구 이름은 로마의 어떤 황제 이름과 똑같았고 지하철 역 중에 그 이름이 있었다는 TMI까지 기억이 나는데도 불구하고 실제 어떤 이름이었는지는 또 잊어버렸다. 기억해내려면 다시 로마 지하철 노선도를 봐야 한다.
우리에게는 100번의 여름도 남지 않았다
다음 날 나는 예정대로, 리도섬 대신 피렌체에 갔다. 베네치아만큼 아름다운 도시이자 많은 사람들의 인생 도시다. '낭만과 열정사이'를 읽으며 상상했던 두우모가 내 눈 앞에 있었고 그 유명한 T본 스테이크는 맛있었다. 중세에서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아름다운 도시였다.
하지만 나는 피렌체에 대한 즐거운 기억이 적은 편이다. 놓치고 온 리도섬 해수욕 때문에 짜증이 나서 도시를 충분히 즐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또한 어찌나 어리석은지! 코로나 때문에 해외여행이 요원해진 지금이라 더 아쉽다. 이 시국에 언제 다시 피렌체에 갈 수 있을까? 코로나가 이렇게 발을 묶어버릴지 작년 이맘때에는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지나간 기회는 잊고 현실에 충실했어야 했다. 정말로,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알 수 없다. 내가 손에 쥔 것은 현재뿐이다. 현재를 충실하게 살자.
최근에 앞으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다.
옵션은 많은데 최적의 것을 찾으려 하니 답이 나오지 않아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았다. 이제는 알겠다. 내가 답을 찾지 못한 이유는 최적의 루트를 찾을 수 있는 판단 능력이, 내게 아직 없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까 그렇다. 서울 전역 상세 지도를 가지고 있고, 위성으로 실시간 교통 상황까지 확인하는 자동차 내비게이션도 허구한 날 도착 시간 계산에 실패한다. 그런데 뭐 일개 개인인 내가 별 수 있을까?
뭐가 좋은지는 살아봐야 안다는 생각이 든다. 지나간 과거를 후회하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불안해하기보다는 마음을 좀 더 편하게 가지고, 나에게 시행착오를 허락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우리에게는 이 아름다운 여름이, 100번도 남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가장 아까운 것은 최적 루트로 살지 못하는 내가 아니라 그냥 지금 이 순간이다. 망설일 시간에 그냥 하고, 후회할 시간에 사랑하는 사람이나 한 번 더 만나자. 그래서 이 마음을 잊기 전에 이 글을 쓴다.
P.S. 글을 쓰며 로마 지하철 노선도를 뒤졌고, 그 친구 이름은 Vittorio였다. 이제는 잊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