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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리 Apr 26. 2021

달리며 생각한 것들


달리며

생각한 것들


부모님이 올라오셨다가 점심만 겨우 먹고 부랴부랴 그 길로 내려가셨다. 먹고사는 게 영 시원찮아 보인다며 두어 달에 한 번 김치며 반찬거리를 채워주시는데 오늘이 그 날이다. 부모님이 가시고 짐을 풀어 정리를 하려고 보니 김치 종류만 다섯 가지, 계란 한 판, 꽁꽁 싸매진 검정 비닐봉지 안에는 김이며 통조림 같은 게 들어있다. 일주일에 한 번 밥을 해 먹을까 말까 할 만큼 식생활이 엉망이 된 지 오래라 사실 엄마가 해준 음식을 끝까지 잘 먹어낸(?) 일이 별로 없다. 처음 며칠이야 엄마 김치며 반찬이 귀해 열심히 챙겨 먹을 것처럼 해도 금방 이전의 식생활로 회기해 버리고 말게 분명하다. 그러다 김치는 쉬어 터지고, 해다 주신 반찬은 맛이 가겠지.다퇴근 후 밥을 해 먹는 건 정말 공이며 시간이 너무 많이 든다. 자취 9년 차지만 여전히 먹고사는 일은 어렵다. 


여러 해를 이렇게 반복하다 보니 엄마의 반찬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 며칠을 장보고, 담그고, 만들어 바리바리 싸 짊어지고 올라오기까지의 수고를 생각하면 되려 속이 상한다. 오늘을 기점으로 냉장고 속에서 하루하루 겨우 연명하다가 별 수 없이 쉬어버리는 반찬은 결국 또 버려질 처지를 면치 못할 것이다. 진작에 좀 챙겨 먹을걸 하는 후회와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두서없이 버무려져 감정이 복잡해진다. 한편에 귀찮은 마음이 들 때는 어떤 죄책감 비슷한 것 때문에 마음은 더 축 늘어진다.   


그렇다고 해오지 말라고 딱 잘라 말한 적은 없다. 혹여나 못 먹고사는 줄 알까, 그래서 더 염려하실까 봐서.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다 못 먹을 것 같으면 미리 익기 전에 통에 나눠서 주변에 친구들이랑 나눠먹어. 먹을 때 먹어야지 시간 지나면 잊어버린다.' 때마다 못 먹고 버리는 걸 엄마가 아는 눈치라 뜨끔했다. '그리고 밥 좀 사 먹지 말고 좀 해 먹어. 어떻게 만날 사 먹는 밥만 먹고 사니. 밥 잘 챙겨 먹는 거 그거 뭐 대수냐고 생각하는 거 같은데, 잘 먹어야 몸도 마음도 축이 안나는 법이야. 바쁜 척하지 말고 좀 챙겨 먹어. 그러다 확 늙어! 오늘 보니까 너도 늙더라." 엄마의 한 방에 명치를 정통으로 맞아 순간에 눈 앞이 어질 했다. 전화를 끊고 마저 정리를 이어했다. 그리고 엄마 말 끝에 생각난 친구가 있어 김치도 좀 나눠 담아두었다. 


평소 같으면 그냥 흘려 들었을 말이 오늘따라 마음에 빙그르르 맴돈다. 터진 물고에 이런저런 생각이 고이기 시작하더니 물음 하나가 떠오른다. '잘 먹는 일'이 중요한 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나는 왜 '잘 먹는 일'을 소홀하게 여길까. 반찬을 정리하는 동안 내게 묻고 또 물었다. 김치 냄새에 허기가 져 뜬금없이 레토르트 밥 하나를 데워 앉았다. 무 생채가 아삭아삭 맛있다. 김장김치도, 석박지며 덜 익은 총각김치도, 겉절이도 맛있다. 같은 김치인데 하나 같이 다 다르다는 게 새삼스럽게 신기했다. 맛이라는 감각에 가만 집중해본 일이 언제였던가 싶은 타이밍에 불현듯 깨달은 것이 있다. '아, 나는 목적 잃은 '열심'을 내며 살고 있고 있구나' 하고 말이다.


느지막이 저녁식사에 초대받아 친구네에 다녀왔다. 초행길이고 오가는 길이 편한 코스도 아니었지만 조금 무리해 자전거를 끌고 집을 나섰다. 그냥 그러고 싶은 날이었다. '엄마의 김치'를 시작으로 골몰하게 된 '먹고사는 일', '목적을 잃어버린 열심'에 대해 달리는 동안 다시 생각을 이어갔다. 중구난방 떠오르는 생각을 일일이 적지 못해 아쉬울 따름이었다. 아무래도 물음을 해결할 중요한 단서가 될 것 같아서. 하지만 내 안에 떠오른 생각이 혹여 저만치 흘러가버린다고 한들 영영 사라지는 것은 아닐 터였다. 그러니 지금 수면에 닿은 생각을 행여 놓칠까 생각하기를 아까워하지 않기로 했다. 40분이면 도착할 거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코스가 쉽지 않아 1시간을 훌쩍 넘기고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밤이 한참 깊었다. 막상 돌아가려니 누적된 피로감이 확 몰려들어 돌아갈 길이 캄캄했다. 밤공기가 생각보다 차서 그런지 처지가 옹색하게 느껴졌다. 완연한 봄인 줄 알았건만 미처 겨울을 벗지 못한 바람이 여민 옷깃 사이로 기어코 스며든다.  '자고 가!' '아니야, 가야지!' 잠깐 그럴까 했지만 말았다. 


세상이 마치 잠이 든 것처럼 새근새근 자고 있다. 순한 얼굴을 한 서울 풍경이 낯설다. 아무도 없는 뻥 뚫린 자전거 도로를 세차게 가르며 거침없이 달리고 있자니 너무 자유롭다. 금방이라도 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이런 게 새벽 라이딩의 즐거움이구나 싶었다. 홀가분한 마음을 감출 수 없어 환호성을 지르고 싶었지만 혹여 잠든 도시가 깰까 소심하게 기분을 냈다. '우우우우우우우우'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찬 바람에 얼얼해졌던 볼이 열기에 녹아 자글자글해질 때쯤, 불현듯 엄마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잘 먹고, 잘 사는 일에 대해서'


여태 몰랐다. 아무리 주변에서 말을 건네어도 들리지 않았다. 건강을 잘 챙겨야 한다는 둥, 달리는 것만큼 멈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둥, 일 말고도 중요한 게 많다는 둥. 동의하면서도 마음에 크게 와 닿지 않았던 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열심히 일을 하는 것만큼 나와 곁을 돌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그리고 나와 곁을 돌보는 일 역시 때가 있는 일이라는 걸. 이제라도 때를 알아챘으니 아무쪼록 다행이다. 


엄마는 내가 끝끝내 다 먹지 못했다는 사실 말고도 더 많은 걸 알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나를 위해 즐겁게 저녁을 차리는 일'이 비단 배만 불리는 일이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리 생각하니 브레이크가 걸린 듯 조급한 마음이 서서히 완만해진다. 내일 퇴근길에는 시장에 들러 장을 보면 좋겠다. 아아, 얼마만인가. 그러고 보니 봄 나물이 한창인데 하마터면 이 계절의 맛을 놓칠 뻔했다. 자고로 봄에는 봄나물인데 말이다. 마음이 비워지는 만큼 페달은 가벼워졌다. 벌써 내일 퇴근 후 저녁이 기다려진다. 


글 ㅣ 글리(정보화) @heyglly

사진 ㅣ unsplash

*이 글은 따우전드 코리아(@thousandkorea)와 함께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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