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고향집, 군산에 다녀왔다. 초, 중, 고등학교를 모두 군산에서 보내 매우 익숙한 동네지만 지난 10년 새에 모르는 길이 생기고, 새로운 동네가 만들어지면서는 잘 알지 못하는 곳들이 제법 생겼다. 그래서인지 집으로 가는 길이 어쩐지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마치 여행자가 된 것처럼 말이다.
이번 여정에는 친한 친구와 함께했다. 처음 여행을 계획할 때만 해도 왠지 구석구석 가이드를 잘해줘야 할 것 같아 적잖은 부담이 있었다. 하지만 금방 이것저것 알아보던 것을 멈췄다. '관광지로 유명한 곳이나 맛집은 굳이 내가 아니어도 그만이란 생각에서였다. 대신 힘을 좀 빼고 평소 자주 오가던 곳, 좋아하는 곳들을 소개하기로 했다.
군산은 바둑판식 길이 많고 그 사이에 볼거리들이 숨어 있어 차로 이동하는 것보다는 자전거나 걷는 편이 더 좋다. 또 평야지대라 자전거 타기가 수월하다. 이런 이유로 미리 자전거를 챙기기로 했다. 미니벨로가 다시 한번 빛을 발하는 타이밍이다.
도착을 하자마자 일찍이 저녁식사를 마치고 자전거를 차에서 내렸다. 슬슬 해가 기울기 시작해 시간을 보니 6시 즈음이었다. 5시면 문 닫는 곳들이 있어 몇몇 곳은 내일로 일정을 미루고 가볍게 동네 투어를 하기로 했다. 작은 팁을 하나 건네자면, 주차는 이성당 앞 주차장 대신 영동 교차로에 있는 공영주차장을 이용하는 것이 훨씬 여유롭다. 먼저 자전거를 타고 옛 군산 세관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문은 닫혔지만 세관, 군산 근대역사박물관, 다다미를 살린 카페(미즈 커피), 군산 근대미술관 앞을 지나며 '이런 게 있다'하고 일러주었다. 그러고 나서 바로 이어지는 진포 해양 테마 공원을 따라 바다 옆 길을 쭉 달렸다. 금강 너머의 장항이, 무려 하구둑이 한눈에 들어올 만큼 거침없이 탁 트인 하늘은 강렬하게 물들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장관이었다. 이 풍경을 아는 어르신들은 진작에 둑에 점처럼 이어 앉아 하늘을 나란히 마주하고 있었다. 째보항이라고 불리는 푹 패인 항구까지 달리다 보면 진짜 옛 군산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관광할 만한 '꺼리'가 없어 인적이 드문 곳이지만 묘하게 낯선 풍경이 영감을 띄워 올린다.
한 숨 돌릴 겸 이성당을 찾았다. 엄마 고교시절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수다 떨던 제과점은 긴 시간 자리를 지켜 내게도 많은 추억을 안겨 주었다. 여름밤 더위를 피해 가족들과 팥빙수 먹던 기억, 토요일 수업 끝나고 친구들과 먹었던 피자와 파스타의 맛, (고교시절엔 피자며 파스타도 팔았었다.), 한 달에 한 번은 학교 간식으로 들어오던 단팥빵, 버스를 기다리면서 사 먹던 아이스크림. 특별할 건 없지만 애틋한 시간들이 묻어있는 곳이다. 친구가 무엇이 맛있냐고 묻길래 고민 없이 크로켓, 야채빵 그리고 아이스크림과 셰이크라고 말해주었다. 크로켓 하나와 아이스크림, 셰이크를 사들고 2층 카페로 올라가 수다를 떨며 먹었다. 아이스크림은 크림의 풍미가 좋고 기침이 저절로 나올 만큼 투명하게 시원한 맛이다. 바닐라 아이스크림과는 전혀 다른 맛이니 꼭! 먹어보길 추천한다.
다음날, 7시에 일어나 은파유원지 한 바퀴를 달렸다. 햇살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이 아름다워 그 모습을 따 지어진 이름처럼 윤슬을 품은 유원지는 아침 산책을 하기 더할 나위 없이 좋다. 호수를 크게 빙 둘러 걸으면 1시간 반 남짓이 걸리는데 자전거로 도니 1시간 정도가 소요됐다. 물빛다리를 가로질러 걸으면 원하는 시간만큼 조절해 산책을 할 수 있다. 다만 자전거로는 다리를 건널 수 없다. 산책로 중간중간 흙길이 연결되어 있는데 자전거 타이어에 무리가 될 수 있으니 컨디션에 따라 코스를 유동적으로 변경하는 것을 추천한다. 피치 못하게 도로 갓길을 따라 달려야 할 때도 있으니 헬멧을 꼭 착용해야 한다. 벚꽃 축제가 열릴 만큼 3월엔 벚꽃이 만발하고, 이후에는 푸른 녹음이 무성해 잠시 볕을 피할 수 있는 그늘이 많다. 서늘하게 걸을 수 있어 산책하기 정말 적당하다. 아, 곳곳에 카페도 많아 잠시 쉬어가기에도 좋다.
여유를 부리며 점심도 먹고, 길가에 앉아 수다도 떨며 신흥동으로 넘어왔다. 신흥동 일본식 가옥(구 히로쓰 가옥)은 이미 너무 유명한 곳이지만 잊지 말아야 할 이야기가 담겨 있고, 적산가옥과 일본식 정원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기에 잠시 들렀다. 근처에 마리서사 책방에도 잠시 들렀다. 큐레이션이 잘 되어 있어 조목조목 구경을 하다 보니 한참을 머물게 된다. 신흥동을 돌아볼 땐 자전거가 더 유용하게 느껴졌다. 골목 사이사이에 초원사진관, 카페, 동국사, 유명 맛집들이 숨어 있어 제법 많이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체력적인 여유가 생기니 그냥 지나쳤던 오래된 집들의 형태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 마치 시간여행을 하고 있는 듯했다.
이번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친구와 자전거 여행 예찬을 아낌없이 쏟아냈다. '모든 게 적당했다' 라면서. 라이딩이 목적인 여행과 여행을 하기 위해 이동수단으로 자전거를 타는 건 물론 완전히 다른 얘기일 것이다. 다행히 우리는 여행을 하기 위해 자전거를 타는데 동의했고, 많은 곳을 둘러보기보다 한 곳에 오래 머물며 동네 탐색하기를 좋아하는 여행 스타일까지 비슷해 물 흐르듯 편안하게 여정을 보낼 수 있었다. 빠르면 놓치는 게 있기 마련이고 느리면 몸이 힘든 법인데, 이런 면에서 자전거는 완벽하게 적당했다. 속도도, 가고 설 수 있는 자유도, 언제라도 쉬어 갈 수 있는 여유도. 정말이지 시간 위를 달리는 적당한 여행이었다.
글과 사진 ㅣ 글리(정보화) @heyglly
*이 글은 따우전드 코리아(@thousandkorea)와 함께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