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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ji Nov 21. 2023

내겐 너무 어려운 'Hi'

길 맞은편 저 멀리에서 누군가 내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인다. 나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든다.


'이번에도 설마 또? 이번엔 아닌가? 옆에 화단에 난 잡초를 보는 척할까? 그건 너무 예의가 없는 건가?'


머리도, 갈 곳 못 찾은 눈동자도, 핑핑 돌아간다. 


정말 고맙게도, 이번 사람은 이어폰을 끼고 누군가와 열심히 통화를 하고 있었고, 그냥 무심히 나를 지나쳐 간다.


'휘유~' 안도의 숨이 나온다. 하지만 긴장을 풀 순 없다.  저 앞에서 또 누군가가 걸어오는 것이 보인다. 


하버드대학교의 언론인 연수 과정인 니먼 펠로우에 선정되어, 석 달 전쯤 이곳 미국 캠브리지에 도착했다. 미국 기자 반, 다른 전 세계에서 온 기자 반, 모두 24명의 기자가 각자의 연구 주제에 맞춰 하버드와 MIT 등에서 수업에 참여하고, 다양한 이슈에 대해 함께 토론을 하는 프로그램이다.  


같이 생활하는 미국 기자님들께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들이 작은 폭탄처럼 느껴진다는 고충을 토로해 봤다. 


"한국의 거리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걷기'와 '이동'에만 집중할 수 있거든.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걸면 정말 나를 아는 사람이거나 사이비 종교인들이거나 그래. 근데 왜 여기선 나를 언제 봤다고 'Hi'라고 인사하는 거야? (좀 더 격식을 차리는 것 같은) 'Hello'도 아니고 'Hi' 라니?"


역시나 배꼽을 잡고 웃는다. 

"푸핫, 동부 사람들은 무뚝뚝해서 덜한 편인데?! 남부 가면 어쩌려고 그러니?"

"아, 그것도 지역 차이가 있나 봐?"

"(남부 출신 기자) 응. 나 뉴욕 갔을 때 내가 자꾸 길에서 하던 대로 'Hi!'라고 인사했더니 사람들이 싫어하더라고. 그래서 재밌어서 자꾸 더 했지~. 난 'Hi, person'인데, 안 그런 사람도 있어"

"어떤 사람들은 'Hi!'라고 하는데 어떤 사람은 안 그러니까 더 어려워! 나한테 어쩌라고?!"


모르는 사람이 자꾸 인사하는 것도 어색한데, 인사하는 어투도 한국과는 완전히 다르다. 한국에선 허리를 약간 구부리면서 공손하게 인사를 하는 게 기본이라면, 여기의 'Hi'는 뭐랄까, 일단 맥주 몇 잔 이상은 들이켜야 나한테서 나올 수 있을 것 같은, 매우 높은 목소리톤의 'Hi~!'랄까? 집 밖을 나설 때마다 미국 버전의 자아를 장착하고 열심히 인사하던 나를 보던 초등학생 어린이 아들이 한 마디 한다. "엄마, 밖에선 왜 그렇게 이상하게 말해?"


게다가 사람이 "How are you? "라고 물으면 일단 "I am fine, thank you."라고 대답하고, 예의 바르게 "And you?"라고 상대방의 상태도 물어보는 것이 예의 바른 미국 인사법의 정석이라고 배웠거늘! 여기 있는 미국인들은 일단 "How are you?"라고 묻고는 답변은 하든지 말든지 관심도 없다.  


이어지는 고충 토로에 미국 기자님들은 "푸하하! 진짜 신기하네. 생각도 못했던 부분들이야." 라며 신이 난 반면, 외쿡에서 온 기자님들은 "I feel you ( 네 맘 내가 안다)"며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 나를 바라본다. 


대화를 나누면 숨겨진 맥락까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던 사회에 대한 이해도, 정치인의 침묵까지 분석하던 유려한 한국어 실력은 하나도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기본적인 인사말인 'Hi' 마저도 어색한, 어리바리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웃음으론 도저히 넘길 수 없는 사건들도 이어진다. 한 달 넘게 기다려 겨우 만난 운전면허증 발급해 주는 직원이 처음부터 끝까지 불친절과 짜증으로 나를 대하는데, '아오, 한국이면 내가 완전 다 뒤집었다!' 속에선 천불이 나면서도 '여긴 원래 불친절한가 인종 차별인가' 사회적 맥락을 몰라 헷갈려하고, 매일 샌드위치 먹는 게 힘들다며 학교에서 굶고 오는 아들을 보며 '도시락 많이 싸가나? 혼자 싸가면 너무 튀는 건 아닌가'부터 걱정하게 된다. 


하지만 나를 모세혈관보다도 더 촘촘하게 감싸고 있던 익숙한 한국 사회를 벗어나 생활하게 되니, 분명 새로 보이는 것도, 배우게 되는 것들도 많다. 요즘 배우고 감탄하는 것보다 까먹는 속도가 더 빠른 만큼, 뇌에서 사라지기 전에 그래도 틈틈이 기록을 남겨보려고 한다.  


 니먼 펠로우들의 본부, Harvard Lippmann 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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