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근사한 아이디어가 있어도 그것을 처음부터 보기 좋은 형태로 가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일단 시작해보는 것이지요. 저 역시 다른 가게에서 힌트를 얻어 소식지나 엽서 보내기를 시도했습니다.(중략) '따라 해도 좋으니 우선은 시작하자'가 제 신조 중 하나입니다.
*가야노 가쓰미_작은 가게가 돈버는 기술_김현영 옲김_리더스북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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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방 접종도 없는 '시작하기 싫어 병'에 걸린 지 오래됐다. 내 눈에 그럴듯한 완성품이 나와야 하는데 내가 그걸 내놓지 못하고 있으니 매번 나의 계획과 나의 행동은 엇박자를 낸다. 지금 이 순간도 그렇다. 그동안 읽은 책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다시 기억하고 싶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엇을 읽었는지 제대로 기록해놓지 않아서 기억을 잘 못한다. 심지어 이미 읽은 책을 '너는 처음 보는구나?' 반가운 마음으로 도서관에서 대출하거나 이미 책꽂이에 자리를 잡아놓은 것과 똑같은 쌍둥이를 데려온다. 책꽂이는 무거워서 받침이 휘고 있는데 나는 의기양양하게 한 권을 더 사 왔다. 책장의 인내심이 어디까지 인지 시험하듯이.
학창 시절 도서관에서 읽은 것들, 이전에 살던 동네 도서관에서 빌린 것들, 이사를 계기로 버리고 사라진 책들이 궁금했다. 예전보다 책의 취향이 많이 바뀐 거 같은데 나는 살아오면서 어느 상황에서 어떤 책들을 봤었지? 그래서 이제껏 몇 권이나 본 걸까? 그런데 나는 읽어 온 만큼 성장했을까?
지금 이렇게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이것 때문이었다.
나는 외로울 때면 책을 읽었다. 슬프면 서점에 가서 표지그림과 제목을 읽어가며 기분을 전환했다. 책을 펼쳐서 읽지 않아도 서점 책장의 빼곡한 제목들 만으로도 가끔 속이 시원해질 때가 있었다. 물론 책을 펼치면 첫인상과 다른 이야기가 불쑥 튀어나와서 '실례했습니다' 하며 바로 덮는 경우도 많았다. 이 세상에는 참 많은 사람들이 이러쿵 저러쿵 말을 하고 있었다.
사회에서 만나는 무례한 사람들처럼 나의 기분을 확 상하게 하는 책은 없었고 대놓고 갑질을 하는 책도 없었다. 앞에서는 친절했다가 뒤통수를 치는 일도 아직 초면인 책이 할 수도 없었다. 물론 광고와 달라서 기대를 저버리는 책들은 있었지만 책과의 소개팅이 그리 감정을 상하게 할 일은 아니었으니 다른 기회의 '책 소개팅'을 기다리면 됐다.
어쨌든 쓱 지나가는 책들의 한 문장 또는 한 문단, 눈에 꽂힌 부분으로 나의 경험과 생각을 정리해 보자고 계획을 세웠지만 실행하기 쉽지가 않았다. '의미 없는 짓일까?' 의심도 든다. '누가 궁금해하지도 않을 텐데 이렇게 공개적인 글로 정리하는 것이 괜찮은 걸까?' 잘 모르겠다.
그런데 또 다른 난제는 시작을 해도 지속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빠쁘지 않다.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차분히 좀 앉아서 적어보려면 내 안의 너무 많은 내가 잔소리를 퍼붓는다. 생각이 무거우니 마치 생각이라는 큰 솜이 나를 흡수해서 물속으로 가라앉히는 것 같다.
나의 생각과 싸우고 있을 때 어반스케쳐를 위한 101가지 팁 중에 재미있는 글이 눈에 들어왔다.
'베테랑 화가도 그림을 망치거나 좌절합니다.
우리는 항상 나아지기 위해 일합니다.
머릿속에서 비난하는 소리가 들려도 무시하고 시작합니다.
어반스케치는 결코 목적지가 아닙니다.
우리는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어반스케치 핸드북: 101가지 스케치 팁_스테파니 바우어_이종출판사 2020-
그림을 잘 그리고 싶은 것도, 장사에 성공하고 싶은 것도 그 외에도 무엇이든 잘하고 싶은 것의 시작은 모든지 어렵다. 맨 처음의 시작도, 지속을 위해 매번 해야 하는 작은 단위의 시작도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매 한 가지이다. 아마도 위 글에서 처럼 여행이라고 표현한 과정의 순간이 아니라, 도착 즉, 완성이라는 끝만 보고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싶다.
기대가 있으니까. 욕심이 생기니까.
오늘도 나에게 불만이다. 머릿속에서 방해하는 생각들이 부글거리며 끓어 넘친다. 마치 가스렌지 불 위에 올려놓은 찌개를 끓이는 것 같다. 설익은 찌개가 부글부글 거품이 일어나며 '나 넘칠 거야!' 협박하듯이 부산스럽다.
그래도 일단 이 찌개는 어떻게든 다 끊여봐야겠다. 살면서 읽은 책으로 내 생각들을 정리해 보는 것, 내가 왜 그런 책들을 읽었는지 그 기억을 정리해 보는 것이 지금 시작한 것이다. 해보겠다고 시작을 했으니 이 생각의 찌개를 다 끓여내야겠다. 책의 밑줄들, 경험들을 우려내면 무슨 맛이든 나겠지? 중간에 불을 끄거나 태우지만 않는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