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들은 쇼핑을 운전하듯 한다고 합니다.(중략) 남성들의 자발적 쇼핑을 돕는 방법은 스태프의 도움보다 매장 내에 부착된 광고물이나 영상을 통한 정보전달입니다. 여성 고객의 경우 ‘머무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여성이 남성에 비해 타인과의 부딪힘에 더 민감하다는 점에 대한 배려입니다.
-우리는 취향을 팝니다_ 이경미, 정은아_ 쌤앤파커스 2019 -
쇼핑 공간의 복잡함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삼성동 코엑스 쇼핑몰이 미로처럼 보이지 않았던 때에는 종종보고 걷기 위해 갔었다. 끊김 없이 걷고 새로운 것들을 보는 시간이 좋았다. 날씨의 영향 없이 친구들과 약속 잡기 좋은 장소이자혼자서도 충분히 시간을 즐겁게 보낼 수 있는 곳이었다. 문구, 패션브랜드, 책, 먹을거리가 줄줄이 사탕처럼 이어져서 발걸음의 이동 폭이 넓어서 지루함이 없었다. 건물의 위 ㆍ아래로 이동하지 않아도 되고, 건물사이를 걷지 않아도 되니 차량방해 없이 계속 쭈욱 걸으며 보는 게 편리했다. 비 오는 날 우산을 들고 인사동, 북촌 골목을 걷는 즐거움과는 또 다른 재미였다.
언젠가평일 오전 11시, 외부 회의가 일찍 끝났다.빈 시간이 생겨 코엑스 몰에 들어서니 나 홀로 VIP손님이 된 기분이었다. 양쪽에 활짝 열린 상점들은 인테리어 잡지의 한 장면들을 연출하고 있었다.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 가운데 홀을 걸으며 이곳저곳 두리번거리는 것 자체로 시간이 멈춘 느낌이었다.사람들과 부딪힐까 봐 조심하지 않아도 되고 내 행동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간혹 도둑이 많은 곳은 손님의 동작을 직원들이 대놓고 신경 쓰는 곳도 있다.) 구경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자유, 물건을 사지 않고 나와도 머쓱하지 않은 기분이 좋았다.
서울에 살 때에는 잘 모르던 불편함중에 하나는 보고 싶은 것을 아무 때나 보러 가지 못하는 것이다. 틈틈이 홍대, 연남동, 연희동, 성수동, 안국동 등 골목을 돌아다니면서 허름한 가게의 푸짐한 배부름, 작은 소품 가게들을 구경하는 눈의 즐거움, 빵순이의 코를 벌렁 뒤집어 놓는 달콤 고소한 빵냄새, 눈이 또롱해지는 진한 플랫화이트의 한 모금이 있는 곳 등 걷고 싶은 만큼 보물섬처럼 발견하게 되는 작은 길들이 멀어졌다는 것이다.
그런 길들을 찾아가는 것도 심리적 거리가 웬만해야 저항감이 생기지 않는데, 자꾸 더 멀어지는 것 같은 착각이 진짜로 고정이 되어버렸다. 내가 걷는 만큼의 세상이 내 머릿속 세상이 되다 보니 차츰 사람의 보폭이 작아지다 못해 마치 영역 동물처럼 그 자리에서 굳어져간다.
오늘은 신나는 장날이 왔다. 작년부터 가끔씩 그림 보부상이 나의 생활권에 찾아온다. 꽤 많은 작가들의 작은 그림들로 채워진 다채로운 엽서들과 스티커, 포스터가 가득한 팝업스토어가 백화점 1층 한가운데에 펼쳐졌다. 집에서 마을버스로 오가는 거리이지만 고양이처럼 내 영역에서 대부분의 일을 처리하다 보니 지하철 역 근처 상점이 많은 거리에 나가는 날은 '읍내 나가는 날'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사는 곳은 나무와 물이 많아서 주변에 너구리, 멧돼지, 왜가리, 오리, 고라니 등이 같이 살고 있다. 전광판의 쏘는 불빛에 저녁에는 눈이 따갑고 사람들의 파도에 쉽게 지쳐 숨이 턱턱 막히는 한낮의 도심에서는 대면 대면 했던 자연을 이제는 슬리퍼권으로 자연스럽게 누릴 수 있어서 나의 어릴 적 소원은 이루었다. 그러나 이전처럼 조금은 복잡하고 싶은 마음이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기어 올라와서 나 스스로가 참 당황스럽다. 이 놈의 변덕은.
작은 엽서들과 소품들을 볼 때에는 잠시 그 앞에 멈춰서 눈을 굴려줄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시력이 나쁜 탓도 있지만 작가마다 독특한 느낌이 다 다르기에 이 작가는 누구일까? 어떤 상황을 표현한 것일까? 가까이서 보는 느낌과 멀리서 보는 느낌의 차이를 팔을 들어 가까이 멀리 뻗어가며 발견한다.
"엄마 이거 귀엽지? 이것도 저것도 귀엽다. 나는 이거 살려고"
"응, 그래 빨리 골라. 가야지."
"잠깐만 여기 봐봐 이런 것도 있어."
모녀가 나누는 대화가 내가 멈춰 선 자리에서 들려온다. 걸음을 재촉했던 아주머니는 딸의 두 손에 들린 그림과 이리저리 이끄는 손에 따라다니며 어느덧 구경 삼매경에 같이 빠졌다. 귀여움에 푹 빠진 딸은 아주머니가 사주겠다는 말을 만류하고 굳이 "내가 살 거야"라며 씩씩하게 대답하더니 그런데 어떤 것을 골라야 할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점점 멀어지는 두 모녀의 달콩한 대화를 비집고 내 옆으로 큰 장바구니가 다가왔다.
"이게 뭐예요? 이 가격이 진짜야? 이건 어디에 쓰는 거예요?"
목소리가 제법 큰 아주머니가 물어보신다. 바퀴가 달린 장바구니를 이끌고 어딘가 급히 가는 길, 잠시 구경을 하다가 궁금해지신 모양이다. 엽서와 아크릴 제품의 가격이 그리 착하지 않게 느끼신 것 같았다. 나도 처음 보는 것들을 아는 만큼 요모조모 설명을 하니 휙 발걸음을 돌아서 간다. 중얼중얼 남기는 말은 잘 듣지는 못했지만 빠른 발걸음과 함께 급히 사라졌다.
누구에게나 귀여움의 값어치가 같을 수는 없다. 대학원에서 들은 어렴풋한 일화가 기억이 생각났다. 교수님이 회사 사장님에게 즐거움을 서비스로 파는 사례를 들려줬더니 '요즘은 그런 이유 때문에 사람들이 돈을 지불하냐'라고 물어봤다는 것이다.
모든 물건의 가치는 사람마다 세대마다 다르다. 인플레이션으로 달라진 동일한 물건의 가격은 자꾸 예전을 비교하게 된다. 미술관 복도의 큰 벽면에 자장면 가격이 처음 국내에 등장한 이후 얼마나 상승했는지 그래프를 그려놓은 벽을 본 적이 있었다. 수십 년 동안의 시간이 지났으니 그때와 지금의 맛은 다를 것이고 재료도 편리함도 달라졌겠지만 그래도 자꾸 뒤를 돌아보면 섭섭해진다. 그래프는 매우 가파르게 산을 오르고 있었으니까.
그림 앞에서 작은 귀여움에 소란스러운 모녀의 대화와 나에게 말을 건 무뚝뚝한 아주머니와의 짧은 대화가 있은 후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작은 그림을 기분이 가라앉을 때 쳐다보시면, 나름 은근슬쩍 옆구리를 쿡 찌르며 웃음이 날 수도 있으니 속는 셈 치고 하나 사보세요'라고 말해볼 것을. 난 역시 하고 싶은 말은 집에 와서 생각난다. 그것도 누워서 자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