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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털찐 냥이 Feb 16. 2023

10. 플라스틱 녹는 맛

무슨 맛일까?

분리배출된 플라스틱 가운데 재활용이 가장 쉬운 것은 페트다. 국제 표준 코드에서 페트를 1번으로 표시하고, 한국에서도 다른 플라스틱은 모두 플라스틱으로 표시하지만 페트만 별도로 '페트'라고 표시하는 이유도 페트가 가장 쉽게 재활용되기 때문이다.

-김병규_플라스틱은 어떻게 브랜드의 무기가 되는가_미래의 창_2021-


요즘 고민은 반찬통이다. 편리하다 보니 반찬통 대부분을 플라스틱으로 쓰고 있는데 점점 플라스틱의 유해성에 대한 걱정이 생긴다. 한동안 안 써서 안쪽으로 밀어 넣었던 무거운 유리 반찬통을 다시 꺼내놓고 있다. 반찬통을 검색하다 보니 누군가 이런 푸념을 적어놓았다. '나이가 드니 손목힘이 없어져서 무거운 유리그릇들을 정리하고 있다'라고. 아무래도 가벼운 플라스틱보다 설거지를 하는 것도 소분한 반찬을 꺼내는 것도 손목의 힘이 많이 들어간다. 그러니 모든 반찬통을 다 바꿀 수는 없을 것 같다.


페트병에 든 생수, 반찬가게에서 온 스티로폼 용기, 냉동실에 얼려놓은 비닐봉지들 생각을 하면 플라스틱은 염려증을 만들 만큼 모든 먹거리와 연결되어 있다. 뜨거운 배달음식을 담은 용기들은 포장을 벗기면서 국물에서 '플라스틱 녹은 맛이 나겠구나'라며, 없는 맛을 상상하게 된다.


분리수거를 할 때도 스트레스를 받는다. 최대한 내용물이 남지 않게 비우고 외부의 스티커가 남지 않게 뜯어야 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 손톱이 부러질 뻔한 아찔함도 여러 번이고 유리병에 붙은 스티커는 왜 그리 잘 찢어지는지 한 번에 벗기기가 불가능해서 결국 물에 담가 놓는다. 한참을 담가놓으면 스르륵 스스로 깨끗하게 유리병을 감싸고 있었던 스티커가 떨어져 나간다. 분리수거도 주방 일의 한 가지로 이래 저래 수고가 든다. 재료 다듬기가 시작이라면 설거지 시간을 더 늘어나게 만든다.


주방에서 뿐만 아니라 화장대에서도 작은 통들과 힘겨루기를 한다. 튜브에 들은 화장품은 생각보다 신경을 더 써야 한다. 꾹 눌러서 나오는 크림류의 화장품, 치약등은 종종 손가락 힘을 농락한다. 다 썼구나? 안 나오네? 싶지만 막상 튜브의 맨 위를 가위로 자르면 상당히 많은 양의 내용물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결국 분리수거를 위해서 튜브에 들은 제품들은 다 쓴 것 같다는 착각을 가위로 잘라낸다. 튜브 상단을 가로로 잘라서 안에 남은 내용물을 몇 차례 더 사용하던지 아니면 내용물을 다 긁어내서 비우고 분리수거함으로 보낸다.


이 글을 쓴다고 며칠 활자를 열어놓고 지내며 유리그릇과 컵을 알아보던 중 결국 마음을 돌리는 일이 생겼다. 오븐에 들어가도 깨짐이 없고 스팀 뚜껑까지 달린 꽤 넉넉한 그릇을 산산조각 내고 말았다. 김치볶음이 들어있는 채로 손에서 미끄러져 바로 바닥으로 나가떨어졌는데 두꺼운 유리 조각이 바닥을 치고 바로 튀어올라 손을 베는 순간이 1초 동안 일어난 듯했다. 앗! 앗! 이 두 마디를 내는 동안에 바닥은 유리파편 바다가 되고 반짝이는 돌이 되어 여기저기 빛에 반사됐고 손가락에서는 피가 뚝뚝 솟아났다.


김치와 같이 나뒹기는 유리 조각들이 만든 허탈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유리그릇들은 다시 얌전히 원래 있던 자리로 들어간다. 안 그래도 도자기 컵도 잘 깨 먹는데 한번 깨면 파편 찾기가 더 어려운 유리그릇을 쓰겠다고 한 것이 무리였다. 나에게 맞지 않는 것이다. 착하고 싶어도 나와 맞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다. 다른 쪽으로 착한 방법을 찾아봐야지.


일단 손에 들어온 플라스틱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법을 계속 생각하고 있다. 페트의 경우 쓰임이 다양하다. 책상 쓰레기통 대용, 볼펜꽂이 대용, 수경식물 재배용, 달걀보관용, 등 일단 길이를 작게, 길게 잘라 쓰면서 필요에 따라 일회용을 다회용으로 만들려고 노력한다. 쓰레기 봉지로 구매한 묶음 비닐봉지를 반을 자른 페트병에 입구부터 넣어서 걸어두면 정전기가 일어나지 않고, 한 장씩 떼어 쓰기 편하다. 안 버릴 수 없지만 최대한 일회용 인생이 되지 않게 다양한 자리에 놓아본다.


엉뚱하지만 '나'라는 존재도 이렇게 한 자리에만 계속 있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이 들었다. 때때로 삶을 살아내는 것이  예측 불가능 하고 환경의 영향이 큰 파도처럼 몰려올 때가 있다. 서핑을 하듯이 유연하게 파도를 잘 타며 살아내야 하는데 나는 참 뻣뻣하기 그지없다. 그래서일까?  몸도 마음도 잘 다친다. 오늘도 현실에서 최대한 안전지대에서 어떻게든 잔잔하게 있으려고 애를 쓴다. 못마땅하더라도, 내 욕심만큼 되지 않더라도 새로운 것들을 시도해야 하는 것을 안다. 몸과 마음이 강하게 저항해도 해야 한다. 그래야 몇 달, 몇 년 후에 지금과 다른 자리에 있을 것을 안다.


"나이가 들어도 뭐든지 계속하면 늘더라고요." 여러 가지 취미를 꾸준히 하고 있는  아는 어른이 말했다. 또 다른 분은 "자꾸 하니까 여러 번 하니까 아주 조금씩 느는 거 같아"라며 거북이를 닮은 경험을 전했다. 나보다 연배가 높은 분들을 만나면 항상 듣는 말이 있다.


"아직 젊잖아, 뭐든 할 수 있는 나이야"

"저 나이 많아요~ 늦었어요."


돌이켜보면 나이가 문제라기보다 너무 일찍 번 아웃으로 탈수 증상을 겪은 마음이 문제였던 것 같다. 마음이 무기력에 녹아내렸었다. 엉뚱하지만 다 쓴 페트병을 반으로 자르고 이곳저곳에 새로 배치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이렇게 여러 쓰임이 있는 곳에 놓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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