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평화공원 2
제주 리조트 방에서 <스프와 이데올로기>를 다운받아서 봤다.
4.3평화공원에서 상영된 영화였다.
방 바로 앞으로는 호랑가시나무가 있었는데 밤이면 그곳에 조명등이 들어왔다.
호랑가시나무 이파리는 아주 매력적이다.
단단하게 생겼을뿐더러 그 빛나는 윤기는 꼭 짜면 맑은 기름이 흘러나올 것처럼 반짝인다.
뿐이랴,
가시도 아닌 것이 가시처럼 살짝 이파리 끝에 돋아나 있는 것이 성깔과 매력을 점하고 있다.
눈이 피곤하면 가끔 그렇게
나의 정원에 있던 호랑가시나무를 바라보면서 다큐를 보았다.
겨우 닷새 내게 할애된 나의 정원이었지만 아쉬움은 전혀 없다.
그보다 더 길게 나의 정원으로 하려면
나는 그것을 가꿔야 하고 혹시 안 좋아지면 안달복달을 할테니
그러면 호랑가시나무의 매력이 보나마나 사라질테니
이렇게 닷새 동안이 나의 정원으로 매우 적합하다.
정원 뿐이 아니다.
이제는 모든 다가오는 것들에게 그다지 애달파 하지 않는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흘러가게 둔다.
(안두면 어쩔껀데)
이제 달라질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런 소소한 시점이 얼마나 오랜 시절을 거쳐야 다가오는 건지,
다 보고 나니 아주 깊은 밤이었다.
이제 제주엘 가도 그다지 일찍 서두르지 않는다.
오히려 집에서 보다 더 느긋하게 일어나고 느릿하게 한술 뜨고ㅡ
가져간 반찬에 밥만 하면 되어서 아침에 할 일이 전혀 없다ㅡ
천천히 나가니 늦은 밤에 잠들어도 괜찮다.
스프는 백숙을 말한다.
사위가 집에 오면 닭을 잡아 준다는 이야기에 기인한,
제주도 산 감독의 어머니는 일본인 사위에게 마늘을 가득 넣은 백숙을 끓여준다.
감독의 의도적 장치인지는 모르지만 사위도 시장을 봐와서 장모에게 백숙을 대접한다.
마늘을 까며 마늘에 관한 이야기가 오고 가는데 마늘을 줄창 까야했던 나에게는
(이제는 허리가 아파서 까진 마늘을 사서 해 먹는다) 그런 대목이 좋았다.
언제나 그렇지만 어떤 거대한 것들이 사람을 감동하게 하지는 않는다.
아주 작고 소소한 것들이 솜방망이처럼 마음을 살짝 치지만
마음이란 게 에밀레종 같아서 여운이 오래 간다.
엄마는 일본에서 살다가 해방이 되어 제주로 건너왔다.
제주가 일본과 가까워선지 제주 사람들이 일제가 침략하던 시절에 일본에 가서 많이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해방이 되자 다들 제주로 다시 돌아왔는데
4.3 사건이 일어나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 상황 속에서 그들에게 조선총련은 조국이 되고
제주는 고향이 되었다.
4.3에 대한 참혹한 기억들이 선명하게 살아 있어서 남한보다는 북한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감독의 부모는 조총련에 충성을 다하여서 아버지는 훈장을 많이 받고
큰아들은 김정일 생일 선물로 북쪽으로 보내졌으며 나머지 두 아들도 북송되었다.
그리고 엄마의 동생들도
그리고 어머니 아버지는 북쪽의 아들들에게 생필품을 사서 보내는 것이 인생의 일이 되어 버렸다.
양영희 감독은 부모들의 삶을 기록하다가 ,
제주 4.3 사건 때문에 부모가 조총련을 향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일회용 여권을 받아서 한국에 오게 된 감독과 사위 그리고 감독의 어머니
그러나 이때 이미 엄마의 치매가 깊어져서
어떤 질문에도 답을 하지 못하는 엄마가 되어 있다. ,
이런 우연은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먹먹하게 만드는지.,
돌아오던 날 다시 4.3 공원엘 들려서 박물관에 들어갔다.
제주 화산섬의 특징인 동굴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입구는 죽음을 기억해내기에 적절해 보였다
그리고 동굴이 끝나고 박물관의 시작점에 놓여있던 백비.
무려 7년 7개월 동안 한도 없이 계속 되었던 비극
지금은 그저 4월 3일이라는 날자로 기록되어 있지만
백비는 비어 있는 채
이 참혹한 비극의 진정한 이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3.1절 행사에 참여한 시민을 향한 경찰의 발포
당시 미군정은 친일경찰을 고용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치안을 위한 정당방위였다고,
폭도가 아닌 시민에 대한 발포에 제주도는 95%가 참여한 총파업을 했고
제주 무장대가 경찰청을 습격해 사상자가 났다.
이후 5.10 총선거에 불응 이승만은 제주도를 레드섬으로 규정했고
세상에,
구축함을 보내 해안선을 봉쇄했다니(국민을 향한 전쟁 아닌가)
군인 경찰 서북청년단으로 구성된 토벌대 (이름도 무섭다)는
거침없이 양민 학살에 나셨다.
이게 4.3의 의 전모다.
9명 중 한명이 사망했지만
연좌제의 두려움 때문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한 시절이 계속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사과와
폭도가 아니라 희생자라는 이름 앞에 오열하던 사람들
박물관에는 다랑쉬굴의 모습이 재현되어 있었다.
굴에 숨어있는 사람들에게 불을 지르고 그 안에서 그대로 타들어 간 주검들,
<기억의 저장소, 기억의 자살을 막는 것. 모두가 희생자이기에 모두가 용서>
박물관을 표현한 박물관 언어다.
며칠 전 신경숙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다시 다랑쉬 굴을 그녀의 글에서 만났다.
다 살지 못한 사람들 몫까지 내가 함께 살고 있는 것”이라는 유정의 이야기를 통해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 다시 삶 쪽으로 발을 내디딜 힘을 얻는 사람의 이야기,
사자들의 한에는 어울리지 않는 듯한
평화라는 이름이
평화가 무엇인가를 더욱 생각하게 하던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