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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Mar 15. 2024

꽃이라고 하여 슬픔 없을까

베드로의 부인






꽃이라고 하여 슬픔 없을까, 

작은 것들, 어린것들, 아름다운 것들 속에 슬픔이 고여 있듯이 꽃들도 그렇다. 

아주 드물게 양지바른 쪽에서 제비꽃이 한두 송이 피기 시작했다. 

이렇게 이른 봄에 피어나서 봄 여름까지, 

하마 꽃이 필만한 시기에는 어디에서나 피어나는 꽃. 



 봄의 전령사인 제비꽃은 제비가 돌아오는 때를 알려주기도 하지만 

오랑캐를 주의하라는 뜻으로 오랑캐꽃이라는, 

체구에 맞지 않는 이름으로 불려 왔다. 


이 제비꽃에 폐쇄화가 많다. 

늦봄이나 여름에 피어나는 제비꽃은 꽃잎을 아예 열지 않는다. 

피어나지 않고 혼자 자가수정을 해서 열매를 맺는다. 

저 작은 꽃이 세상을 알고 때를 알고 벌 나비의 마음을 안다는 뜻이기도 하다. 

세상이 온통 눈부신 꽃 천진데 어느 벌 나비가 지표면 바로 위의 작은 꽃에 마음을 주겠는가, 

제비꽃은 그런 자신의 처지를 미리 알고 

자가 수정을 해서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남기는 것이다. 

생명 있는 것 치고 존재에 대한 열망 없는 것 있으랴만 

콩만한 제비꽃의 존재를 생각해보면 눈물겹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자신과 환경을 알아서 꽃잎을 열지 않는 제비꽃의 생태는 

존재에 대한 섬뜩한 성찰을 담고 있기도 하다. 

오직 하나님 앞에 홀로 서 있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거대한 우주이지만 

또 너무나 미약한 존재인 나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사순절 기간이다. 

이 무렵이면 들춰보는 그림 중 하나가 바로 카라바지오가 그린 ‘시몬 베드로의 부인’ 

때는 예수님 잡혀가신 날 밤이고 무대는 제사장 집 마당. 세상은 이미 어둠으로 가득하다. 

카라바지오는 특히 빛과 어둠, 

그 대비에 의한 극적인 표현 ㅡ테네브리즘ㅡ을 즐겨 사용한 작가이다. 


어둠이 장악한 세상에 두사람의 얼굴에만 강렬한 빛이 비치고 있다. 

어둠속에서 잘 보이지 않는 로마병정은 매우 위협적으로 보인다. 

여종은 냉정하고 무심한 눈빛으로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은 병사에게 말하고 있다. 

여종은 확신하듯 두 손가락을 베드로에게 가리키며

 ‘이 사람 예수당이에요’ 말하고 있다. 

병사도 베드로에게 손가락을 들이대며 다짐하듯 묻는다. 당신 맞아? 예수당? 

베드로는 손가락으로. 아니 두 손 전체를 들어서 

나? 나라고? 아냐, 나 아니야, 

틀림없이 말을 더듬었으리라. 

성경에 보면 베드로의 부인은 점점 강도를 높여간다. 

 예수님을 부인한 것은

아마도 자신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이었을 것이다. 

깊게 패인 주름에는 절절한 고뇌가 엿보인다. 

거짓말하는 사람들이 그러하듯, 

여종도 병정도 바라보지 못한 채 살짝 아래를 향한 그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베드로가 지녔을 회한을 가장 강렬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저 시선이다. 

그 시선은 예수님 곁에서 그토록 강렬한 충성을 맹세하던 베드로 자신을 생각하던 시선일까,

아니 내가 지금 여기서 무슨 짓을 하고 잇는건가, 

이게 지금 나인가? 

원래 나는 어디로 갔는가. 

표준 새번역에 따르면 세 번째 부인은 이렇다.

‘거짓말이라면 천벌이라도 받겠다고 맹세하면서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사람은 알지도 못하오하고 잡아 떼었다.’ 

바로 그 때에 닭이 두 번째 울었다. 

그는 땅에 쓰러져 슬피 울었다. 


이스라엘에는 베드로 통곡교회가 있다. 

닭이 두 번 울기 전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라는 말씀을 기억하라는 뜻으로 교회 탑에 닭이 꼿꼿하게 서있다.

여행을 하다보면 의외로 교회의 첨탑위에 닭이 많이 있다.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옥상 정원에는 엄청나게 푸르른 닭이 있었다. 

  

카라바지오는 한 장의 그림 속에 긴 인생의 여정을 축약한 통렬한 드라마를 담고 있다. 

화가들이 그리고 싶어 하는 것은 풍경의 재현이 아니다.

풍경이나 사람 속에 감추어진 내밀한 <속>이다. 

파울 클레도 말했따. 

' 예술은 보이는 것을 재생산 하는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것이다'

혹시 카라바지오도 부인하는 베드로를 통해 슬픔을 표현하고 싶었을까?

에덴동산을 떠난 이후 사람의 속성이 된 슬픔,

오직 열매를 위해 피지도 못하고 시들어가는 폐쇄화의 슬픔처럼

생의 존재에 자리한 근원적인 슬픔 말이다. 

 

 

제비꽃 종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엄청나게 많다. 

처음에 꽃을 알아갈 무렵 제비꽃을 구분해보려 했으나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그냥 제비꽃이면 제비꽃이지 무슨 제비꽃이라고, 

구분은 언감생심이다. 

꽃 공부를 열심히 하다가 어느 순간, 내 한계가 느껴졌다

잘하는 것 하나가 그 지점이다. 

자신을 알아 욕심내지 않는 것, 

한계를 안다는 것은 욕심을 안다는 것이다. 

사진도 그렇다. 

한 때 필름카메라, 아사히 팬탁스(지금도 집 어느 귀퉁이엔지 있을 것이다)를 가지고 사진공부를 하러 다녔다. 

그러다 디지털 카메라를 갖게 되고 무리해서 카메라를 샀는데 

다양한 렌즈를 알게 되고 욕심이 시작되더라, 

그 세상도 끝이 없는 세상이었다. 

그 때 마침 손전화 카메라가 가벼워서 찍기 시작하고 

그 편리함에 만족해서, 

그래 무슨 작품을 할 것도 아닌데, 카메라에 대한 욕심을 놓았다. 

살아보니 멈추기를 잘하는 것도 지혜로운 삶의 방법이더라.


사순절은 슬픔의 시간이다. 

닭이 울고 베드로와 눈빛이 마주치는 예수님을 기억해야 하는.....

하나 핀 제비꽃도 닭울음소리가 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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