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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지현 Jan 19. 2022

할아버지의 달리기

한 할아버지가 소리도 없이 내 앞에 서계셨다. 언제오신거지?

나는 "무슨일로 오셨어요?" 라고 물었다.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큰 목소리로.

나도 마스크를 쓰고 있고 할아버지도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까 말을 하면 절로 목소리가 높아진다.

할아버지는 마스크를 쓰고 있다는것을 잊은듯이, 그리고 목소리의 크기를 조정 할 의도가 1도 없다는 듯이 웅얼웅얼 하셨다.

나는 말할테니 넌 찰떡같이 알아들으라는것일까.

(몇 번의 대화 후, 할아버지도 최대한 힘을 들여 말하고 있다는것을 알게 되었다.)

입모양이 보이지 않으니 답답해서 나는 한번 더 여쭤봤다. "무슨일로 오셧어요?"

할아버지는 "땅,,땅.."이라고 말하시는듯했다. 어르신 분들에게 마스크는 아주 큰 대화의 장벽이었다.

나는 옆 선배님을 구원의 눈길로 바라봤고 선배님은 할아버지께 "토지대장 보시겠어요?"라고  능숙하게 말하셨다. 금방 알아듣는 재주를 가진 사람도 있다. 다행히..


할아버지는 "땅을 합쳤는데.. 땅을 합쳤는데.."라고 또 웅얼 거리셨다. 모든 말들이 다 끝맺음이 없는듯했다.

나는 초보 공무원이니 그저 선배님이 일을 처리하시는것을 어깨너머로 (아직은)의욕넘치는 눈을 하며 쳐다봤다.


선배님은 능숙하게 할아버지에게 주소를 묻고 일을 처리하셨다. 할아버지는 프린트된 토지대장이 뭔가 잘못된것 같다는 눈빛으로 또 웅얼대며 "72...72..."라는 숫자를 말하셨는데. 역시나 난 또 못알아들었다. 선배님은 "할아버지, 뭐 메모해놓은거 없으세요?"라며 큰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는 "차에...차에..."라고 하시더니, 내 앞에 소리도 없이 서 계셨던 것 처럼 순간이동 하듯 냅다 뛰어 가시는게 아닌가. 방금 전 만해도 움직일 때 마다 1초씩 걸리는것 같더니 발끝을 땅에 내딛으며 스타카토로 뛰어가시는것에 나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는 여러번 접었다 편것같은 종이 한장을 들고 뛰어서 들어오셨다. 


나는 그 모습이 이상하게도 귀엽게 보였다. 민원 처리가 끝나고. 할아버지는 또 다시 본인의 속도로 움직임마다 1초씩 걸리며 서류를 받고, 옷안에 지갑을 찾고, 지갑을 열고, 천원짜리 한장을 빼고, 나에게 전달하고, 나는 500원을 거슬러 드렸고, 500원을 받으셨고, 500원을 지갑에 넣으셨다. 


나는 생각했다. 중간에 그 속도는 무엇이었을까? 땅 주소를 알려주기 위해 뛰어나갔다 오셨던 그 속도는?

어쩌면 그 논과 밭은 할아버지가 평생을 일구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던 소중한 땅이었겠지. 손가락 관절이 굳어서 지갑을 여는데 수 초가 걸리고. 한 동작 한 동작에 들숨 날숨이 느껴지는 할아버지가 한 숨에 휑 하고 뛰어 갔다 오실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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