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지현 Jan 09. 2023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를 보고 나서


고등학교 졸업식날 아침, 나는 다른 날보다 더 격하게 엄마와 싸웠었다. 엄마는 짜증을 아주 쉽게 내는 사람이었다. 엄마의 말은 차분하고 담담한 적이 거의 없었다. 짜증이 술의 알코올농도처럼 진했다 옅었다 했는데 무알콜음료였다가,  대부분은 맥주였다가,  감정이 고조되면 소주나 폭탄주가 되기도 했다. 그 시절 나는 엄마의 규칙 없는 '짜증 농도'에  이골이 났었다.(지금 생각하면 갱년기 여성에 대한 나의 이해도, 배려도 부족했었다)  나 역시 그런 엄마의 성격에 지지 않았는데, 엄마에게 버럭버럭 화를 내고  '욱'하는 감정을 앞세워 육탄전도 서슴지 않았었다. 

어쨌든,  졸업식날 엄마는 오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날 싸우며 생각했다. 엄마가 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런데 20년이 지난 지금도 엄마와의 가장 서늘한 순간을 떠올리면 그 졸업식날이 어김없이 떠오른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여자>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같은 속옷'을 입을 수 있는 관계,  모녀의 이야기를 다룬다. 엄마인 '수경'은 딸이 원하는 어떠한 애정도 주지 않는 매정한 엄마다. 대형마트 주차장 차 안에서 딸인 '이정'과 싸우다 딸이 홧김에 차에서 내리자 차로 딸에게 위해를 가하기도 한다. 이정은 엄마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고 생각하고 엄마에게  진정한 사과를 받길 원한다. 그러면서 영화는 급발진 사고인지 엄마 '수경'의 의도였는지 파헤치는 장르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는 그 실마리를 쉽게 풀어주고 두 여자의 내면에 집중한다.   

나처럼 영화 속 '이정'에게도 엄마가 학교 졸업식에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큰 상처로 남아있다. 그래서 영화의 초반에는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는 '이정'에게 공감하면서 보게 되지만, 이정 역시 수경만큼이나 공감을 받기 어려운 캐릭터다. 관객들은 이정의 음울한 분위기와 미숙한 인간관계가 엄마의 애정결핍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하며 보기가 쉽다. 그러니까,  '수경' 만큼이나 '이정' 역시 감정 이입이 힘들지만, 그래도  이정의 미숙함에는 '이유'를 만들어준다. 우리는 그 이유를 '모성애'의 결핍 때문이라고 이해한다. 나 역시도 엄마가 주는 무한한 사랑에 대한 대한 주문이 잠재의식 속에 있다. 한편, 수경 역시 홀로 가게일을 하며 이정을 키웠다. 그래서 딸에게 보상받고 싶은 마음이 크다. 그런데 우리는 엄마의 희생을 인정하기보다는 엄마의 맹목적인 희생을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가 결국 화해나 용서의 방향으로 가지 않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진다. 나 역시 어릴 적 엄마와 다툴 때,  '누가 낳아달라 했어?'류의 레퍼토리로 엄마를 화나게 했었다. 그러니까 엄마가 나에게 애정을 쏟아야 하는 것은 엄마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라고 말하면서 맞서는 것은 힘이 없다. 왜냐면 엄마 자신도 희생에 대한 보상이 결국엔 없으리라는 것을 잠재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사회적으로 '선량'하길 강요받고 있다. 재클린로즈의 <숭배와 혐오>에는 고대 영아 살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어머니 노릇을 하지 않는 결정을 하는 것'도, '어머니 노릇'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엄마가 죄의식을 가져야만, 불쌍한 아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엘레나 페란테의 <잃어버린 사랑>에서 주인공 레다가 어린아이의 인형을 훔치게 되는데, 흔히 인형은 모성을 투영한다고 하지만, 소설에서 레다는 이렇게 말한다, " 어머니는 놀이하는 딸에 불과해, 나는 그저 놀고 있었던 거야."  인형은 모성의 이상향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어머니가 딸에게 했듯, 이 불행한 존재를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시도일 뿐 인 것이다.

(<숭배와 혐오> P.203 참고)


이 세상에서 어머니만이 사랑을 독점하는 것은 아니며, 어머니에게 이를 요구해서도 안된다

  내 아이에 대한 사랑을 엄마인 내가 독점하고 있지만, 그 무거운 사랑을 나눠질 수 없는 것이 결국 나를 가장 힘들게 한다. 버지니아울프는 자기 가족 우선, 자기 아이를 우선시하는 태도가 사회적 해악이라고 했다. 나는 가끔 엄마가 되고 '나의 아이'가 생겼다는 것에 큰 공포를 느낀 적이 있다. 그것은 '나의 아이'와 '다른 사람의 아이'가 명확히 구별되는 세계로 발을 들인 것이 나를 극도로 이기적으로 몰고 갈 것이라는 공포다. 내 아이의 불행이 곧 나의 불행이 되는 것 같은 족쇄가 나를 매일밤 내 아이를 위한 기도를 하게 할 것이다. 그것은 결국 내가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모성애에 대한 신화, 완벽한 엄마 노릇에 대한 기대, 내 자식에게 나의 욕구를 투영시키려는 마음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다시 영화로 돌아가서, 나는 이영화를 보고 고등학교 졸업식날 오지 않은 엄마와의 화해가 가능했다. 엄마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운명도, 필연도 아니다. 내가 받았던 사랑도 엄마의 의무가 아니었다. 나는  이정과 수경이 모성의 굴레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과거에 얽매지 않고, 엄마의 사랑에 집착하지 않아도, 혹은 엄마와의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아도 '엄마'라는 거대한 산을 훌쩍 넘어갈 수 있으리라. 

작가의 이전글 <포괄적 성교육>, 행복한 관계를 위한 교과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