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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지현 Jan 31. 2018

엄마됨에 대하여

 아이가 돌이 지나서 걷기 시작하고 혼자서 조금씩 놀기 시작 할 무렵, 절대로 없을 것 같던 둘째 고민이 스멀스멀 생겨나기 시작했었다. 올해 아이는 네 살이 되었고, 이제 어린이집을 다닌다. 주변에는 점점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었고 나는 더욱 둘째를 가지는 게 맞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본격적으로 둘째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둘째가 있으면 좋을 이유야 말하자면 끝이 없을 정도로 많지만, 두 아이를 키우게 되면서 내가 겪게 될 어려움 역시 상상 이상으로 많을 것이다.

남편은 육아에 적극적이지만, 처음 내가 아이를 낳고 겪은 우울증과 육아로 인해 피폐한 생활을 하는 내 모습을 보고 외동으로 키우자고 말했었다. 그래서 요 근래 내가 불쑥 둘째 이야기를 꺼내면 당황스러워하며 힘들 것 같다는 내색을 비춘다. 그러다 또 '나쁘진 않지'라는 말을 하며 바뀐 내 마음에 동조를 해주기도 한다.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에서 아이를 자꾸 가지려는 딸에게 엄마는 '모든 것을 갖추지 않으면 불안해하는구나'라는 이야기를 한다. 어쩌면 나 역시, 네 식구의 안정적이고 다복한 가족의 모습을 떠올리며 '행복은 거기에 있을 거야'라고 세뇌당하였을지도 모르겠다. 세 식구는 어딘가 불완전해 보이고 내 아이가 혼자라 외로워 보이는 것도 지금 내 마음이 '완전'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모성'은 때로 나 자신을 갉아먹는다. 그리고 점점 더 나를 텅 빈 상태로 몰고 가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 그것은 '나쁜 모성'이다. 레일라 슬리마니의 소설 [달콤한 노래]에서 루이즈라는 보모는 자신이 돌보던 밀라와 아당이라는 아이 두 명을 살해한다. 루이즈는 친자식보다도 더 각별하게 아이들을 돌보았고 진심으로 그 아이들을 사랑했다. 그런 루이즈가 왜 아이를 살해한 것일까? 소설을 다 읽어도 루이즈는 어떤 사람이었고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아니, 정보가 거의 없다. 루이즈는 보모로 일하던 가정에 영원히 속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루이즈를 고용한 폴과 미리암은 선뜻선뜻 보이는 그녀의 기괴한 행동에 몸서리쳤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밀어낼 수 없을 정도로 그 둘은 자신들의 세계에 갇혀 일에만 몰입하였다.

루이즈에게 보모로서의 일은 '모성'그 자체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진심으로 아이들을 사랑하고 돌보는 것 외에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루이즈가 '누군가가 죽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생각하게 된 시점, 혹은 그 생각이 발화된 계기는 밀라와 아당이 어느 정도 자라서 보모의 손을 아기 때만큼 필요로 하게 되지 않았을 때였다. 강력하게 집중된 모성이 그녀의 내면을 모두 갉아먹어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영화 [보이후드]에서 다 큰 아들을 대학에 보내면서 '나에게 남은 것은 이제 장례식 밖에 없어'라고 울던 엄마의 대사가 떠올랐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정말로 엄마 자신의 반쪽을 혹은 그 이상을 떼어내면서 이루어진다. 다 성장한 아이를 독립시키고 텅 빈 반쪽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나 역시 갑자기 와르르 무너질 것 같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두 아이를 낳고 키워서 독립시키는 내 미래의 모습이 그다지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는다. 나 는 지금 아이를 키우는 일에 매우 집중하고 있고 힘들어하고 있고 그리고 그 일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안전한 집에서 나가고 싶지 않다는 솔직한 마음도 있다. 그리고 육아를 하면서 나의 자존감은 바닥을 쳤고 사회생활이 무척 그립지만 도무지 자신감이 생기지가 않는다. 사회에서 쉽게 상처 입고 영혼은 탈탈 털려서 집으로 돌아와 남편과 아이에게 히스테릭한 행동을 할까 봐 겁도 난다. 어쩌다 이런 겁쟁이가 된 것일까. 그런데 겁쟁이가 된 마음까지도 이기적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면 한번 더 깊게 나를 자책하기도 한다. '엄마'로만 사는 것은 이렇게 가끔 나를 비굴하게 만든다.


육아를 하게 되면, 온 마음을 아이에게 쏟고 아이가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며 완전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그 행복을 또 한 번 느낄 수 있기를 바라는 것도 당연한 마음이겠지. '엄마'역할이 나를 지켜주고 있으면서 나를 고립시킨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지만, 또 '엄마'가 되는 것만큼 '완전한 삶'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모든 면에서 아주 건강한 '엄마'일 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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